(17강) 4:12-22 오직 예수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는 말은 그 무엇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뭔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붙들어 심문을 합니다. 사도들은 그들 앞에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증거 합니다.

사도들은 그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고집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로 얻어지는 구원이었고 이 구원은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의 도를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상황에서는 '예수님 외에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없다'는 단호한 선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이 처한 본문의 상황에 대해서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 일제 시대나 공산 치하에 있던 상황에서 총 칼을 들이대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위협 당하는 처지라면 본문과 같은 사도들의 말이 마음 깊이 다가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소위 말하는 평화시대이니 만큼 예수의 도를 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도 없고 핍박하는 것도 없으니 사도들처럼 목숨을 내 걸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야 할 그런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적인 상황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전도한다고 해서 붙잡아 가두는 것은 없습니다. 소위 종교의 자유를 말하면서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종교를 전파한다고 해도 인정해주는 것이 국가의 법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라고 해도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위협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종교로 존재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가가 취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마치 기독교는 무조건 국가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릴 수가 있는데 국가를 반대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국가라는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에 존재하는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입니다. 하늘의 권세에만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국가라 할지라도 예수의 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요구한다면 복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복종해야 할 권세는 오직 하늘의 권세뿐이라는 말은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와도 연결되고 교회와도 연결되고 교단과도 연결되는 말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목사가 권세로 존재할 수 없으며, 교회 나 교단 역시 권세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목사나 교회나 교단의 권세에 복종할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 역시 무조건 목사에게 반대하고 교회나 교단에 대해서도 반대적인 입장을 취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라면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한 것을 말한다면 복종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말씀하지 아니한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왜곡되게 전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면 복종할 수 없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현세적인 삶의 안정입니다. 그 어떤 것도 현세적인 삶을 위협하고 흔드는 것이라면 모두 악으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도가 그들의 현재적인 종교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 역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때 많은 교회가 이에 대해 반발합니다.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 예배나 헌금 십일조 등에 대한 성경적인 참된 의미를 그대로 드러낼 때 그것을 예수의 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적인 이유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보다는 교회의 기초를 흔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보호하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예수의 도를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부하고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기초는 주일 성수나 십일조 준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준수하는 것만이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잘 유지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일 성수 또는 십일조 준수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말라거나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이 그리스도 앞에서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교인들로 하여금 주일을 지키도록 하고 십일조를 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행위를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야 하고, 복과 연결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한다고 해버리면 결국 교인들의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의 현세적인 유지가 위협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가 신앙적으로 결코 평화로운 시대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성행하고 난무한 것으로 인해서 예수의 도가 위협받고 무너지는 심각한 위기의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은 복음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복음 밖에서 본다면 현대 교회가 행하는 것이 극히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종교적인 모습들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가 도전 받는 위기 상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현재를 본다면 지금의 이 시대야말로 교회는 풍요로우나 복음은 빈곤하다고 말해야 할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현 시대는 사도들의 시대보다 더 심각하고 큰 위협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현 시대가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에 맞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 사회는 어떤 하나를 절대적인 진리로 규정하고 그 진리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인정되는 것을 진리라 하기 때문에 사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말할 때 마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세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들의 사고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바뀌는 것이 그리스도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통용되는 것일 뿐,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교회 밖에서 이방인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는 무리들 안에서 절대적 진리를 전함으로써 서로 조화할 수 없는 무리로 규정받고 배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는 조화할 수 없습니다. 서로 조화하고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그것이 좋은 것이고 사랑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진리 안에서는 오히려 진리를 포기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화를 이루고 양보하고 타협함으로써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사실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닌 구원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부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경우와 상황이든 그리스도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여야 합니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이것이 여러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양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힘든 일이 있고 배척을 받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도들을 붙들었던 사람들은 사도들을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고 회유할 수도 없음을 알고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더 이상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의 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계를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사도들의 복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았던 것이지 사람의 말에 복종하며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복종한 것이지 목사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편한 삶을 위해서는 사람의 말을 들어줘야 합니다. 힘있는 자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배척받지 않는 편한 삶이 약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리를 포기한 자로서의 마지막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알 때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진리로 알고 살다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신자로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 밖에 없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권세에도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자로서 그 이름만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