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4:23-31 사도의 기도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잡혀 갇힌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는 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만 들을 뿐이라는 단호함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을 죽이고 싶은 것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마음이었으나 사도들이 행한 일을 보고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로 인하여 할 수 없이 풀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풀려난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 동료들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한 말을 얘기하게 되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기도에서 30절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라는 기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나음과 어떤 능력적인 표적을 원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절로 오해되기 십상입니다. 사도들도 그러한 기도를 했으니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를 깊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러한 의미로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24절의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는 기도를 보면 단지 하나님을 높여 부르기 위한 의례적인 표현법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기도에서 고쳐져야 할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하나님' 등의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기도를 위한 의례적인 표현으로 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를 기도답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미사어구 정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복종하고자 하는 뜻도 없으면서 그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로 그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말하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재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오직 복종할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는 오직 복종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진행해 가시든 피조물인 우리는 복종하는 것만이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신자로서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또 25-26절에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고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열방이 분노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분노를 말합니다. 즉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음으로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들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인간중심으로 모든 일을 경영하는 것을 두고 허사를 경영한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것은 하늘에 권세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은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이렇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복종만이 요구될 뿐임을 아는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욕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0절의 기도를 대하면서 사도들도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우리도 우리 병을 낫기 위해서 기도하고 표적과 기사를 보여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경에 대한 섣부른 판단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되어지는 모든 역사는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나쁜 일인 경우 그러한 말을 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아무리 육신에 유익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 이상 결코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 대한 분별이 우리의 영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도들은 예수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들려서 위협을 받다가 풀려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위협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징벌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사도들을 괴롭히도록 그냥 두고만 보시고 결국 그들의 힘에 의해서 사도들이 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결과가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사도들이니까 그런 핍박을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없습니까? 사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핍박이 당연하게 여겨지신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신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유익을 받아야 하고 잘살아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핍박하는 세력을 그냥 둠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사도들에게 닥친 난관을 없앰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관을 있게 하셔서 일을 이루십니다. 어떤 난관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사도들을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무리들을 그냥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을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의 세상을 그냥 두고 보고 계십니다. 하루라도 빨리 불의의 세력을 심판해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이 우리 직성이 풀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불의를 인정하시는 것처럼 잠잠할 뿐입니다. 때로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불만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힘으로써 세상을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신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의미로 병낫게 해달라고 하고 표적과 기사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은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낫게 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달라는 것이 아니라 병을 낫게 하는 모든 일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되도록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주재로 부르는 사도들에게 맞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쓰여지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는 멋있고 폼잡을 수 있는 그런 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쓰여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이 어떤 환난과 핍박과 위협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이 증거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표적과 기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절대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을 소원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도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손을 들어 병을 낫게 하는 일이나 그 외 모든 표적과 기사들이 자신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여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핍박을 받아도 괜찮고 위협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핍박을 받고 위협을 받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우리 자신의 일을 더 소중히 여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내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기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사도들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사도들의 마음과 일치되고 사도들과 같은 심정의 기도가 나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환난과 핍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