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4:32-37 믿음의 모습

사도들의 기도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대주재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주재하시고 자신들의 하나님의 주재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뿐임을 믿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될 것인가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만 증거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핍박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되어진 일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크게 여기는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모습이 본문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44-45절에서 언급된 초대교회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의 믿음의 모습은 재물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재물을 나누자'라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면 곤란합니다. 우리를 그럴 수 없으니까 아예 그렇게 할 생각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물건을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믿음이니까 이렇게 하자'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서로 나누는 것은 믿음의 증거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의 기도 다음에 재물을 나누는 것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고백하면서 오로지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은 재물에 대해서도 제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되어지는 표적이고 기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참된 믿음의 기사며 표적이라면 이 믿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1:1관계로 끝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1:1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고 봉사한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부모와 이웃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부모도 공경해주고 이웃도 사랑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할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할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33-35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사도들이 그것으로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함으로 무리들이 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가 있음으로서 자연히 되어지는 모습들이지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 중에 핍절한 자가 없는 것은 있는 자들이 판 것을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핍절한 자가 있다는 것은 있는 자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겼다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내어놓지 않음으로서 핍절한 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핍절한 자는 우연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팔아라'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믿음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누가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는 명령은 오직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에게서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예수님의 은혜에 살아있고 믿음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얻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와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처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끝까지 회개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들 곁에 핍절한 자가 핍절한 채로 지낸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것을 내것이라 주장하고 내어놓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보내신 핍절한 자가 계속 핍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절한 바를 바라볼 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초대교회가 한 것처럼 너희도 있는 것을 팔아서 나누라는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쉽게 말합니다. 은혜를 얻었다느니 예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거의 모두가 개인적인 생각과 묵상에서 나와지는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러한 고백도 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백에 대한 순종입니다. 은혜를 얻었고 은혜를 안다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고백했으면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들의 증거로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크게 곡해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즉 말씀에 은혜 받은 증거를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다는 것을 목사에게 가져와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는 것은, 사도라는 한 개인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의 권능에 복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목사에게 가져오라는 것이나 교회에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신자는 자신의 소유까지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로서 사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믿음이 신자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가를 명심하면서 날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경계하고 고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우리 소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주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으로 그쳐 버립니다. 즉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의 증가로 여기면서 소유를 증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자로서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결코 자신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며 자랑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자기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내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이고, 몇십년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역시 내것에 대한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면서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만 여깁니다.

신자가 믿음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것을 쌓고 내것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요구를 하십니까? 여러분의 연약함을 알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십니까? 어쩌면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할 것이 없는 인생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고, 믿음에 대한 문제 역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기도할 것도 없는 신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말입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연약한 자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처럼 하라고 해도 할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할 마음도 없는 자가 곧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를 말하고 성경을 말했지만 적당한 수준까지 순종하는 척하고 더 깊이 들어가기는 거부해 버리는 것이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끝까지 내 것은 지키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않는 채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들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본문을 대하면서 재물에 대해서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