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로서 크게 잘못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는 언제 이런 복을 주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을 위해서 구원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도외시한 생각임은 분명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주어지는 결과일 뿐, 목적은 아닙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도 사랑도 모두를 자기 개인에 국한시켜 생각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은혜고 사랑이며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자기 개인적인 일에 국한시킴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신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하나님을 자기들의 일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익숙해져 있는 구절은 아마 8절일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이 말씀은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 많이 애용되어 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세상에 마지막 남기신 지상 명령이라고 하면서 전도하고 세계를 향해서 선교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고 또는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의 의미 자체가 왜곡되어져 있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문에서 8절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른 구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8절 한 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조심할 것이 이것입니다. 어느 한 구절에 대한 중요성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 자연히 다른 구절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다른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구조를 볼 때, 8절의 말씀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다가 하늘로 가시면서 갑자기 한마디 명령을 남기신 것이 아닙니다.
8절은 6절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6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셔서 자기들 앞에 나타나 계시는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를 묻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제자들이 묻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으면 세상위에 굳게 서게 되는 날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것은 분명 예수가 메시아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그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고통 중에서 해방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를 얻게 하는 그 날이 바로 이 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관지어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다시 부활하게 하신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을 위한 때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굳게 세워주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직 자신들을 위한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문제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나 그 기한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니 만큼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한에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될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로 고생을 한다고 할 때, '하나님, 저의 이 고생이 끝날 때가 언제입니까? 빨리 이 고생이 끝나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고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셨다면 주시는 때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 기한이 언제든 끝날 때가 언제든 하나님의 권한이니만큼 끝날 때를 관심두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때와 기한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8절 한구절만을 보고 예수님이 전도하라는 명령을 하셨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신자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전도하라는 명령으로만 이해하면 이런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오류란 전도라는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쓰는 한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전도하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더욱 많이 도와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서 일해줄 때에 대해서 관심을 둔 제자들의 물음을 배경으로 하고 주어진 말씀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증인으로 살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나의 때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너희들을 위한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니 마음두지 말고 너희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라는 의미입니다. 그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곧 8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구원은 자기들에게 해당된 자기들의 몫이고 이방인, 즉 사마리아인이나 또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 즉 땅 끝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만이 아니라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와 이방 나라까지에서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어떤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어디에서든 언제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있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신자의 본분이며 그것이 곧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성경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3년 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적을 목격하고 말씀을 들을 제자들조차도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증인으로 산다는 것이 곧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증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예수 믿으라'는 것으로 증인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분임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증인이 실제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을 살고, 그분이 가셨던 길을 감으로써 그리스도가 누구신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권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가 곧 성령이 임한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곧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런 말씀들이 기존의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존의 교회가 하고 있는 전도나 선교에 대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를 증거하기 위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 모습을 보면 무엇을 하면 그것을 자기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을 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모든 것을 결국은 나 자신의 신앙을 높이고 굳게 세우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우월한 자신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하고 열심히 했으면 더 한 것만큼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고 형제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안타까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사람으로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신자의 본분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바로 이러한 약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문제에만 집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진심으로 나는 맞고 저 사람이 틀리다면 틀린 그를 맞는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힘쓰는 것이 아니라 틀린 그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은 굳게 세워지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세력들은 망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옳은 자신들 편을 들어서 하루 속히 틀린 저들을 심판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틀린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지 누군가를 심판하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에게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여러분 자신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쓰여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으시다면 그 열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욱 더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람으로 증인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도구 삼아 자신의 이름을 높이셨습니까? 하나님이 자기편을 들어서 자신을 핍박하는 무리들을 심판해주시기를 원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생각하시고 그 길을 가십시오. 그것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고,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지 않고는 증인이 되어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인생을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쓰는 일에 있어서 너무 어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에 너무 익숙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 나를 세우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분명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껏 익숙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성령 받음이 그를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 받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는 도구로 이용되버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그러한 것은 성령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알았다는 것으로 그쳐 버린다면 결국 안다는 것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은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알게 된 분을 생명으로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감으로서 그가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증인으로 나타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그리스도를 알고 배우는 일에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증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대해서 감사함이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여러분의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그런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것은 겸손과 용서와 섬기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있는 자리에서 증인되는 성령의 사람으로 이루어짐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본분이며 존재 이유인지를 마음 깊이 묵상하시고 신자로서 마땅한 삶의 길을 부지런히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