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5:1-11 교회의 순수함

신자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막연히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함을 인정해주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이 분명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가차없이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존재하시고 그들을 다스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막연한 분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했다 잘못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설사 잘못한 길을 간다고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진짜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전혀 간섭한 적이 없다는 경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자신이 어려울 때 생각할 뿐, 불의함과 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믿음의 바른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서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1,2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는 구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들 부부도 아마 그러한 것에 영향을 받아 그들도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오기로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판 것을 다 가져온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두 부부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헌금의 문제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록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헌금의 문제가 잘못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본문을 이렇게 이해함으로 인해서 많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입에 대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할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봉급의 실 수령 금액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명시된 금액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문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은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헌금을 제대로 하라거나 십일조를 속이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추는 것을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삽비라 역시 9절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라는 말씀을 보면 사도에게 땅을 판 값에서 얼마는 감추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중점은 이들 부부가 땅 값 얼마를 감추었고, 또 그 사실을 속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속이는 것이고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처음에 작정한대로 헌금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처음에 얼마를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대로 작정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를 헌금해라'고 계시해서 작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작정한대로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빚을 내서라도 작정한대로 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까? 본문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령을 속인다 시험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권세 역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의 권세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왕의 권세에 복종합니다. 그러나 왕이 죽으면 권세는 단지 상징으로 남을 뿐입니다. 즉 인정해주는 권세일 뿐 복종할 필요는 없는 권세일 뿐입니다. 죽은 왕이기 때문에 설사 왕이 어떤 지시사항을 남기고 그 지시에 불응한다고 해도 왕이 살아서 자신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왕의 지시에 대해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이 살아있다면 그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며, 왕의 명령을 불응할 때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의 상징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는 왕으로서의 권세가 아니라 죽어있는 왕의 상징적인 권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의 지시를 불응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결코 어떤 처벌을 할 수 없는 그러한 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들이 헌금을 속인 것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계신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헌금을 속이면서도 그것을 감출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고방식이었다면 자신들의 거짓말을 사도들은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생각으로 가질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헌금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서 어울리는 친목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서로 어울려서 자기들 마음에 맞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 단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생명과 상관없는 인간의 교회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은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성령이 속겠습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내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속인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존재하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행위대로 심판하실 분임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면서도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을 죽어있는 신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보여질 수 없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다시 생각할 것은 '나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는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기로 한 것은 처음부터 인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4: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믿는 사람들은 소유를 팔아서 나눴습니다. 그중에서 요셉이란 사람은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요셉을 바나바, 즉 권위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요셉은 은혜를 받음으로써 은혜에 의해서 행동하게 된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바나바로 부르면서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보여주는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그가 받은 칭찬에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자기 소유를 팔아서 헌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상 자기 소유를 버리고자 할 때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으로 얼마의 돈을 감추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을 하나님이 죽이신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교회의 순수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인간의 수단과 인간의 방법으로 세워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굳게 세워지는 교회가 하나님이 지키시고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스립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의도로만 모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순수함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성령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인간적인 생각만 하게 됩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골몰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생각하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잊지 않고 모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는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가 나서야 하고 우리가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순수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