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이고 재산 판 돈의 얼마를 감춤으로 인해서 죽게 된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헌금을 감추었다는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자신들이 한 일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의 행위를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성령을 속인다는 것은, 성령 앞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며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두고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은 신자된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부르되 너무 형식적이고 의도적인 부름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말하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신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부르되 그 삶에서 염려가 끊이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살아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자된 우리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믿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약한 자를 무시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벗어난 행위이고 성경적인 정신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를 고치지 아니하는 것, 이것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럼없이 믿는 자와는 거리가 먼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를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믿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하나님은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그것만으로도 삶에 영향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를 힘쓰게 되는 모습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에게서 믿음의 권세가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삶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믿음의 능력은 결코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현대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이 무능력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만 소리칠 뿐,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믿음이 세상이 아닌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능력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절대로 무능력한 것이 아닙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큰 능력으로 세상에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우리들이 정작 사는 것은 믿음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 교회는 믿는 자로서의 분명한 증거가 있었고 그 능력이 있었습니다. 12-13절을 보면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의 믿는 자들과 사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힘있는 모습으로 증거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많이 보여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서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혹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랄 만큼 믿음의 능력들이 많이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힘있는 믿음의 능력과 지금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믿음은 그 능력을 상실해 버린 채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현대에 보여지는 신자는 강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똑같이 현실에 민감하며 죽지 않기 위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연약한 모습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무엇을 소망하고 살고 무엇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느냐에 있어서 믿지 않는 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는자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힘있고 성공한 자로 남기 위해서는 세상이 취하는 삶의 방식과 지혜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줄을 잡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뇌물을 바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믿는 자가 세상의 출세에 성공에 매달림으로 인해서 남들과 똑같이 믿지 않는 자를 찾아가 뇌물을 바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이름만 신자인 모습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로 행인이라고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그네가 나그네답게 살지 않고 행인이 행인다운 행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그네라고 하면서 행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그것이 무거워서 허덕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과연 그것을 보고 신자를 다른 세상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신자이면서도 보여줄 증거물이 없는 신자, 이것이 신자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의 당당함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진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에게서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말고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일 수 있는 다른 삶으로 신자의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 표적과 기사가 초대교회에서는 재산을 팔아서 서로 나누고 그로 인해서 핍절한 자가 없게 된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복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물론 본문을 보면 '신자의 능력, 표적과 기사라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다면 신자로서의 표적과 기사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가 병을 고치는 것은 사도들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감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일이 그대로 사도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 존재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것은 베드로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증거물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보면서 믿는 자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하는 표적과 기사가 사라진 것이 오늘날 믿는 자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서 세상과 다른 구별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자기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이 모든 근원이 되시는 인생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인생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증거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믿는 자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있습니까? 그것을 어떤 세상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십시오. 병이 낫는다거나 기도를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거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차원의 표적과 기사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표적과 기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으로 불러냄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보여질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힙으로 삼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에게서 마땅히 보여져야 할 표적과 기사가 보여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누리는 것을 똑같이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같이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차지한 자리를 같이 차지하려고 마십시오. 신자는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도 잠시 후면 훌훌 털고 떠날 사람들이고, 지금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도 다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신자로서의 표적과 기사가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신자에게서 표적과 기사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별된 인생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신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염려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힘으로 삼을 뿐입니다. 믿는 자의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보여질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