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5:27-42 기적 이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이로 인해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것을 시기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가 사도들을 붙들어서 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사도들에게 보내서 옥에서 그들을 나오게 하십니다. 옥에 갇힌 자가 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만 두고 본다면 그렇게 신기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의 사자가 와서 그들을 구출했다는 것은 사도들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이적이고 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도들에게 그런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으면 이제는 아무도 사도들을 건들지 못하고 두려워하게 되고, 사도들은 마음놓고 복음을 전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을 보면 옥에서 나온 사도들을 다시 붙들어다가 공회 앞에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으로 옥에서 구출된 사도들이 다음부터는 순탄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붙들림을 당하고 대제사장으로부터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는 위협을 받음을 볼 때, 도대체 '주의 사자로 인해서 옥에서 구출 받은 기적을 체험한 것이 사도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은, 기적을 체험하기만 하면 자신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입으면 자신이 현재보다 수준 높은 사람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차별화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한 생각이 기적에 대한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기적을 베푸신 분이 누군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지 기적을 입은 자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 기적으로 인해서 차별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 중풍병자, 소경 등등의 병자를 고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들 하나하나가 목적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이었지 병고침을 받은 사람을 특별히 다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을 고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음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죽을 병이 들었다가 나은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시는 죽지 않는 불사의 몸으로 변형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나사로의 몸이 다시는 죽지 않은 신비한 몸으로 변형되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몸이 다시 사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한 이적을 직접 체험한 나사로라 할지라도 그 몸은 여전히 썩을 몸이었고 결국 그도 나중에 다시 죽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오셨으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명백히 증거해주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기적을 입은 나사로는 여전히 죽기 전의 나사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놀라운 기적을 한번 체험을 하기만 하면 뭔가 삶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과는 차별된 존재가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적에 대한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적은 기적을 베푸신 분에게 그 목적과 초점이 있는 것이지 기적을 입은 자는 단지 기적을 보여주는 도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있다면 그 기적에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마땅하지 '나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과는 다르다'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기적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와서 사도들을 옥에서 나오게 한 것은 분명 신비한 일입니다. 사도 개인적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경험만으로 본다면 특별한 사람들임이 분명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옥에 갇혀도 주의 사자가 구출해주는 그런 기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을 입은 사도들이 다시 붙들려서 공회에 서게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이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데 환경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보내서 사도들을 구해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20절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 때문에 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옥에서 구출된 기적 이후에는 그 누구도 사도들을 위협하지 못하고 붙들지도 못하고 순탄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붙들려서 공회에 세워지고 죽음의 위기에까지 처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옥에서 구출한 주의 사자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기적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고 그저 한순간의 기적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우린 본문에서 사도들에게서 보여지는 기적의 증거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위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적을 경험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곧 기적을 맛본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붙들어 놓은 것은 세상의 권력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들은 당시 종교적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가둘 수가 있었던 것이고, 결국 '사도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에 의해서 갇혔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권력에 의해서 갇혔다고 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사도들을 풀어주게 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에도 방해받지 않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인간의 책임 아래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임 아래서 되어지는 것이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도들이었다면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고 붙들 수 없도록 막아주시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에서는 전혀 반대된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권력이 붙들고자 할 때 붙들려지고 죽이고자 할 때 죽임을 당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연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인간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기신 생명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맡은 자가 설사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절대로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29-32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떠한 것인가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의 사자를 보내서 옥에서 그들을 구출해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아래 있음을 알았기에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어떤 위기에서도 살려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아래 있고 지키심과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설사 복음을 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책임 아래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옥에서 구출된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면 우리를 어떤 위기나 나쁜 상황에서도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즉 되어지는 모든 일이 설령 내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책임 아래 되어진 것이라는 시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하나님만 상상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세워 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는 참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사도들을 가르친 것은 앞으로 어떤 위기에서도 구출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기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할 자로 세움 받았기에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생명의 말씀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어떤 권력에 붙들림을 받는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고난을 받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책임 아래서 되어진 일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책임지신다는 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편한 삶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맡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어떤 고난과 힘든 일에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게 하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키심이고 보호하심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겪는 힘든 일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그냥 애매하게 있는 일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맡기신 여러분에게 그런 일들을 통하여 복음의 열매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으로 말씀이 살아있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겪는 삶의 어려움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한다면 결국 어렵고 힘들고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보게 되고 감사할 수 있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 아래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사소한 문제에서까지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시고 감사하시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