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6:1-7 일곱 집사

세상에는 분명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있게 하신 것은 세상에 천국을 보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천국이 어떤 것인가를 교회가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천국을 증거하는 일보다는 교회의 일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제를 한다거나, 선교를 하는 등의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중요시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교회를 선전하고 교회를 전파하기 위한 일, 즉 교회를 위한 일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그 일 자체가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가 하는 일들로 인해서 예수님보다는 자기들의 일을 더욱 높이고 자랑하게 되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모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스스로를 점거하고 모일 때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보지말고 그리스도를 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구제든 선교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닐 때 교회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초대교회에 구제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진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 것입니다. 구제는 주고 받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의 쓸 것을 주고 받는 것이 구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만 볼 뿐 일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구제를 하라고 하신 것은 구제라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제를 함으로써 천국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제라는 일을 중요시 할 뿐 구제에 담겨 있는 의미는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일은 있고 가난한 자가 쓸 것을 받은 결과는 있을지 언정 증거되어지는 것은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신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제라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제보다 전도가 우선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이 서로 별개의 일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구제든 무엇이든 그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빠진 구제는 단지 가난한 자의 쓸 것을 주고 받은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구제라는 일을 많이 한 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이 무엇인가가 증거된 것으로 기뻐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교회가 교회의 일에 매인다면 결국 말씀을 기초로 한 말씀 위에 선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일을 위한 교회가 되어질 뿐입니다.

빌 4:18절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오전에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빌립보 교회가 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구제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이 서로 주고 받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로부터 물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제란 단순히 물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란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게 준 물질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빠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제일 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라는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의 구제와 교회의 구제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점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을 주고 받는 관계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과부가 구제에 빠졌다는 것을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즉 구제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단지 자신들의 파벌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벗어나 있는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됩니다. 사도들이 입곱 집사를 세우는 이유는 2-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이 구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일곱 집사를 세운 이유는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라거나 구제는 사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구제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집사를 세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집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집사를 교회라는 조직안에서 하나의 직책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의 모두가 집사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몇 년 나오면 자동적으로 집사가 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집사를 세운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즉 조직을 탄탄하게 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은 일곱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고 말합니다. 즉 열두 사도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하기 위해서 집사를 세워 구제를 맡긴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사도들이 개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일을 집사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전무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초대교회에 발생한 구제로 인한 분쟁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구제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를 교회가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되어진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떠난 구제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파벌에 의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고 구제는 집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구제는 집사가 할 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도가 할 일, 이런 식으로 일에 구분을 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은 구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제나 전도 등의 일이 중단되면 안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중단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를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무엇이든 복음이 증거되고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계속되지만 복음은 중단되는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는 하지만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는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가 교회 일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제든 무엇이든 교회 일은 여러분에게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목사가 할 일은 다만 교회에 복음이 중단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에 전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신자가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도구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을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로 논하고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일을 많이 하면 교회다운 교회고 적게 하면 게으른 교회라는 평가는 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교회의 본질은 말씀이 전파되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은 오로지 생명되는 복음을 세우는가 훼손하는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고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분명 우리가 착한 일로 여기는 구제를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분쟁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제가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로써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받는 관계로만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소중히 하지 않는 마음에서 분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저는 그것을 막을 이유도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피는 것은 과연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는 말씀을 전파할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교회로 굳게 서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을 전할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의 편에 서서 여러분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만약 저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보여진다면 가차없이 저를 거절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이고 여러분에게 유익된 것입니다.

목사는 오로지 말씀편에 서서 말할 뿐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것, 말씀이 옳다 하는 것만을 말할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일을 맡아 하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