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6:8-15 스데반

세상의 사고방식에는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만 주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돈보다도 다른 것을 더 우선으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돈을 줘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우선으로 하고 산다면 그런 사람은 돈이면 뭐든지 다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돈으로 살아가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오늘은 육신의 목숨까지도 신경쓰지 않고 복음을 고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삶입니다. 자기 삶이 우선이고 복음은 뒷전입니다. 우선 내가 살고 복음이 있는 것이지 '복음이 있고 내 인생이 있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보다도 복음을 우선으로 하면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만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인생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하면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어지겠는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마음고생이 많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스데반은 여러분이 아다시피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입니다. 즉 자기 목숨보다 복음을 우선으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스데반이 과연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까?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과연 마음고생을 하며 산 사람의 얼굴입니까? 고민하고 근심 걱정하며 산 사람의 얼굴입니까? 돈이 없어서 실망한 사람의 얼굴입니까? 그렇다면 이 얼굴은 무엇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얼굴입니까? 분명 돈이 아닙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의미할 것입니다. 근심 걱정이 전혀 없는 얼굴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만을 바라봤고 하나만을 소망했고 한분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믿음으로 인해서 보여진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세상 것으로 인한 온갖 고민과 염려와 걱정 근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과는 분명 다른 얼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데반은 오직 복음 하나만을 생각했고 우리는 복음말고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과 내 인생까지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원하는대로 되어지지 않은 인생으로 인해서 실망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하나님이 주신 참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었고 그 진리만이 자기 인생의 길이 됨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이고 희망임을 알았습니다. 돈이 주지 못하는 것을 그분이 주신다는 것을 알았고 돈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그분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데반에게 있어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고 오직 복음만을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예수님보다는 돈이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어쩌면 예수님이 강한 힘이 아니라 돈이 더욱 강한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사실이 그럴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스데반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데반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대로 체포되어서 공회에 끌려오게 되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불만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때 나타나 주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야 할 때는 그가 돌에 맞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내서 스데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시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가는데도 잠잠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삶에서 배운 것이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더라'는 생각이 쌓이고 쌓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을 가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은 필요치 않고 도움도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말은 하지만 정작 기대는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도우셨다거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항상 세상 것을 기대어서 자신감을 가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세상은 오직 세상의 것을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근거로 해서 그 사람을 대우하기 때문에 세상 것이 있을 때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세상의 것을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표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모습으로 전락이 되면 하나님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통해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스데반이 바로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결과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시는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스데반이 죽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말고 다른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증거되는 것이지 세상의 성공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됨으로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고통과 어려움에 버려 두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오직 믿음을 고집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은 스데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길래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요구하신 것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내가 죽고 대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때 그분이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날 위해 죽으신 그분 안에서 이제는 그분을 위해서 내가 죽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린 자꾸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다. 물론 신자는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것으로 이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것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그 길이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정당하게 사는 신자가 세상으로 인해서 오히려 억울함을 당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를 억울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이 뭔가만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했을 어떤 손해가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으시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일에만 충실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신경을 쓰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보다는 세상에서는 편한 인생을 더욱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길을 외면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스데반의 이야기는 신자가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이야기 앞에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부름받은 것처럼 우리도 부름받았음을 아시고 신자로서 걸어야 할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