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7:54-60 스데반의 설교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누군가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른 말이 상대방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를 드러내는 바른 말이라면 그동안 유지해온 인간관계가 깨어지거나 서먹하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할 것을 우려해서 잘못임을 알고도 모른 척, 또는 아닌 척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이것은 매우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도 친한 인간관계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친한다는 인간관계가 걸림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그것을 증거하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바른 말을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고 바른 것이 무엇인가 말해줄 때 겸허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십니까? 아마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사람이 그보다 어린 자의 잘못을 지적을 하면 공손히 들을 수는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는 그마저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어쨌든 어른이 바른 말을 하면 어린 자는 듣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른의 말이 맞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른이라는 권세에 눌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어리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을 할 때 과연 그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자존심은 자신이 무너지고 깎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은 항상 인간을 세우려는 욕망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그것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잘못에 대해서 지적을 받고 바른 말을 듣는다면 과연 인간의 자존심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십중팔구 상대방의 말에 대해 반발하거나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본모습이고 본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스데반 집사인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는 구약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되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설교를 들은 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드러낸 반응은 스데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들의 분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나쁘다. 왜 스데반이 맞는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는가?'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분은 스데반을 죽이는 그들의 분노에서 여러분의 분노를 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분노가 여러분의 분노임을 모르시겠습니까?

현대 교회에서 갈수록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되는 것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면서 진리만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잊어버리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목사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또 하나는 진리에 대한 여러분의 분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사랑하십니까? 진리를 절대로 우리를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죄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보여지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즉 자신의 약점과 더러움은 드러나지 않고 깨끗하고 의로운 존재로 보여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속에서 보여지고 증거되는 것이지 인간의 의에서 사랑과 은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지적되고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가 우리의 불의함을 지적할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의함에서 은혜가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증거될 때 진리를 증거하는 자에 대해 마음속에 분노를 간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악한 감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될수록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버리고 대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교회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복음 아닌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51-53절에 보면 스데반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던 것처럼, 애굽 사람들에게 매를 맞는 이스라엘을 구해준 모세에게 오히려 반발을 했던 것처럼 너희들이 그와 똑같이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되는 것을 참지 못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경쟁에 익숙합니다. 경쟁을 쉬지 않습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시기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이 찔릴 때 그 말씀에 굴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만 봤습니다. 자신들은 작아지고 상대방이 커지는 것으로 봤습니다. 이에 대한 시기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하는 것은 과거 조상들이 시기심으로 요셉을 팔아 버리고 모세를 배척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님을 시기하고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믿는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죄에 있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조치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말한 인간의 시기심의 예는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에서 자라게 되고 나중에 자기 형제의 고통당함을 보고 애굽 사람을 칩니다. 그런데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만류하자 오히려 모세를 배척합니다.

26-27절의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조상의 잘못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서 남을 비판해주는 것은 잘도 용납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됨을 비판할 때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임을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옛날 이스라엘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내가 곤란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도와서 내편에 서서 상대방을 비판하면 좋아하면서 막상 내 자신을 비판하고 나의 잘못됨을 드러내면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진리가 내편을 들어주고 나를 옹호하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진리가 내 자신의 잘못됨을 비판하고 드러내면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또 우상에 대해서 손으로 지은 성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늘에 대한 소망은 사라져 버린 채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늘에 대해서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두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예 마음에 찔림조차 없다면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수준 낮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나 요셉을 시기하고 애굽에 팔아버리고 모세를 배척한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동일한 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스데반의 설교에서 마음에 찔림조차 없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분노하기보다는 말씀에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서 우리의 잘못됨과 죄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우리에게 진심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관심은 오직 진리에 있었습니다. 진리를 전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진리를 전함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그 마음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도외시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요셉을 시기했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내신 모세를 배척한 것처럼,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현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가 정작 예수님을 해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기심과 자존심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가 봅니다.

시기심과 자존심이 무너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의하며 무능력한 존재이며 무가치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나의 자존심과 시기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주님 가신 길로 나를 붙들어 가시기를 소원하시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분명 응답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닌 예수님을 내세우고 자랑하면서,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베풀어진 은혜를 되새기면서 한발 한발 주님 가신 길만 따라가려고 힘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