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8:1-8 흩어진 교회

7장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의 사건을 대하는 우리는 그 죽음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고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스데반이 증거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스데반의 마음은 분명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마음을 안다면 스데반의 죽음을 높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삶은 결코 편한 삶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을 믿는 사람을 산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나를 더욱 더욱 높이 쓰시기 위해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당장 믿음에 대해 의혹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편안한 삶이 되도록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위기와 어려운 상황과 힘든 삶의 현장에서도 자신을 포기하고 대신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더 힘들고 고달픈 인생을 걸어가는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매하고 별 의미가 없는 고생과 어려움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이 신자의 생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서 교회가 오히려 핍박을 받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이 교회의 핍박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아마 사울은 교회를 없애기 위해서 교회를 핍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합니다. 과연 교회가 사라진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폐쇄를 시켰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으로 교회가 다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교회가 건물이라면 인간의 단체라면 분명 교회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석교회'라는 간판이 사라지고 단체가 없어졌다면 은석교회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처럼 은석교회의 성도가 다 흩어졌다고 해도 예배당이 문을 닫았다고 해도 여러분이 흩어진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사신다면 결코 교회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하는 말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예배당이 문을 닫고 은석교회 간판이 사라진다고 해도 여러분의 심령에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다스리시는 성령님이 죽지 않고 살아 계시는 한 교회는 죽지도 사라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내세워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령 심령에 성령을 보내시고 여러분을 붙드셔서 사용하심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핍박이 나서 모든 성도가 흩어졌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흩어진 것이며 따라서 교회의 확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흩어질 때 성도들이 낙심하고 믿음을 포기해 버렸다면 핍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사라졌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세상이 교회를 핍박은 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교회를 무너지게 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핍박으로 인해서 흩어지고 성도들이 믿음을 포기했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와서는 신자인데 교회를 떠나서 흩어지면 신자가 아닌 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예배당에서만 신자가 아니라 흩어진 이후에도 신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모였을 때만 교회이고 흩어지면 교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면 모두 자기가 사는 곳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흩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시든 교회로서의 모습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일용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어딜 가도 신자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세상 사람과 접하며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신자임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를 대한다고 해도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내가 어떻데 행동해야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주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끌려가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형편에서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이 형편을 해결할 수 있을까?'만 생각함으로 인해서 복음의 전파는 사라지고 대신 세상과 똑같은 한 인간의 삶의 발버둥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교회로 모였지만 흩어지면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흩어진 이후에 여러분이 할 일이 무엇인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교회가 자기 한 몸을 키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잘못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가 확장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내 교회의 확장을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내 교회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으로 살기를 힘쓴다고 해도 그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5-6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말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빌립이 있습니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봄으로써 빌립이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단지 '빌립이 열심히 전도했다 우리도 전도하자'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빌립은 그리스도를 말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함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표적이 이적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빌립의 행함까지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도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빌립의 삶 모두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신자는 어디에서든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흩어지면 흩어진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신자로 삼으셔서 여러분이 현재 거하는 곳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직장이 보냄 받은 선교지이며 주어진 형편과 환경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스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면서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겠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흩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흩어짐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육신의 문제에서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의 신자들도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사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결국 나그네 됨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육신으로는 힘들고 피곤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어진 직장, 집, 환경, 여러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로 산다는 것은 내 하고 싶은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습니다. 인생 또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되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힘쓰는 것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모임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흩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성도가 모여서 은혜를 나누고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확인하셨다면 그 믿음으로 흩어진 자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