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 8:14-20 성령 받음

신학은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분의 하나님이 계시고 이 세분은 하나라는 말로써 삼위일체를 말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세분의 하나님이 계심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의 분위기는 하나님이 세분이라는 것을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세분의 하나님을 말하게 되면 기독교가 최고로 여긴다고 할 수 있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 모호하게 될 수 있으며, 또 세분의 신을 모신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분의 하나님이 있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말로써 유일신 하나님이심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삼위일체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는 분명 성령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말하고 있고 성경 역시 성령 하나님께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신자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성령이 임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성령이 임했다'고 말할 때 사실 자신도 뭔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을 한 적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오시고 우리를 인치시고 충만케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능력을 주시고 많은 은사를 행하게 하시는 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볼 때는 상당히 신비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일들이 성령 받은 사람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결과들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할 때 '아 성령이 임했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체험적인 경험이 없으며, 성령이 임한 자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어떤 현상들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성령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관심과 경험에서는 많이 멀어져 있는 현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17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했을 때 성령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안수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뭔가 외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지금의 시대와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시대에서는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모든 것들이 어떤 흔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들을 보면서 성령을 받았다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것이 곧 성령을 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맞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도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다'라는 입술의 고백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지 고백했다고 해서 '성령받은 증거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답답함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성령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실 성령을 받았다는 외적인 경험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경험은 사람들마다 다를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성령이 임한 자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하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성령이 함께한 경험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함께 한 경험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체험함으로써 종교적 쾌감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욕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하늘이 축복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경험적인 것보다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행전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에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되어지는 것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내가 직접 성령이 함께 한다는 외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엇이 성령이 원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능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살피면서 자신이 성령을 따라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성령이 임하는 외적인 경험이 중요하고 그것이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경험한 자들을 우리 앞에 세워두심으로써 그들을 보고 판단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안수하고 성령이 임하게 된 일도 단지 사마리아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오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의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지만 아직까지 유대인이라는 차별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기 전에 보았던 환상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에 짐승과 기는 것과 하늘을 나는 짐승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늘에서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음성이 들리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시각에는 아직도 더러운 것과 정결한 것의 구분이 있었고 이러한 구분에 의해서 분명 사마리아에 대해서도 차별의식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에 의해서 말씀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안수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성령을 받게 된 것은 결국 성령이 임하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에게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임하게 된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특별히 성령이 임하는 체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성령이 임한 자이고 누가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학연 지연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대하는 것이 성령이 함께 한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서 열심히 예수를 전도해라는 의미로 보기보다는 성령은 결코 사람을 구분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면 분명 그 증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시각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행동을 내세워서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리에서 누구에게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곧 성령받은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성령 받은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을 함정으로 이끌어 갈 뿐입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여러분을 스스로 성령 받음에 대해 의심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내가 성령 받았는가?'가 아니라 '성령이 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이 사실에서 성령은 결코 누구도 차별하지 않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그 누구도 판단하고 차별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곧 성령이 임한 증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