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 8:26-40 성령과 빌립

26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라고 말하고 있고 29절에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직접 구체적으로 전달되어지는 것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지금도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진다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무엇이 하나님이 뜻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태로 사는 것보다는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확실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9절에서도 성령이 빌립에게 병거를 타고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가는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에게 나아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빌립은 그 지시대로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가게 되고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세례까지 베푸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에게 성령은 사실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빌립에게 어떤 식으로 지시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에디오피아 사람이 지나갈 때 '저 사람에게 나아가고 싶다'는 빌립의 바램을 성령의 지시로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마음먹은 것이 곧 성령이 지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성령이 함께 하는 옳은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에서처럼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에게 지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빌립이 과연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고 일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빌립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주의 사자에게 이끌리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살아가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은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빌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장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나 말도 다른 존재가 나에게 간섭하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나 좋을대로, 즉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 보일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한가지 더 특이한 것은 39절의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는 구절입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영이 빌립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신기하다는 시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빌립의 행적의 주관자입니다. 빌립이 과연 스스로 행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를 주장하는 분이 따로 존재하는지가 본문의 중요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엉뚱한 것에 관심을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중요한 것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령을 가르쳤다거나 내시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빌립이 성령에 의해서 이곳 저곳으로 끌려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의 의지와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빌립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주장되는 빌립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빌립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편한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만이 아니라 성령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든 모습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성령으로 인해서 어떤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성령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게 하지 말아달라'는 소원이 담겨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내 길을 가는 것이고 결국 그 길은 멸망의 길임을 알기 때문에 능력이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영에 주장받고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성령을 구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의 편함을 우선으로 합니다. 나의 편함을 위해서는 신앙은 잠시 덮어 버려도 좋다는 식입니다. 물론 사람으로서 자신의 편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곤할 때 교회 간다는 것은 사실 귀찮은 일입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올 때 교회에 간다는 것도 귀찮은 일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에는 '매주 가는 교회인데 오늘 하루 빠진다고 해서 별일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편함을 따라서 행동하다보니 교회를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편함을 따라 사는 것이고 주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빠지고 싶은 마음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곧 내 편함을 우선으로 하는 생각이고,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내 편함 때문에 교회를 빠진다면 그것이 곧 내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주의 영의 다스림을 벗어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불편하고 힘들다고 해도 교회를 가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을 따라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교회를 빠지면 안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함을 따라 사는 것과 주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예로 들어서 말씀드린 것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나오는 일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모든 삶에서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편함과 내 이익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간다면 그가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빌립은 분명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그를 주장하면서 그 인생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다르시면서 세상에서 잘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다스리고 인도하는 인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으로 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증거되는지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빌립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공을 얻었습니까? 빌립만이 아니라 사도들 모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하나님을 위한 죽음이며 고통이었습니다. 스데반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으로 밭길 분이고 신자는 다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으로만 고민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다고 했는데 왜 결과가 이 모양이냐?'라는 불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를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성령에 이끌린 결과를 보십시오. 비록 빌립이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그에게 세례를 주기까지 했지만 결과는 성령이 가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신자되게 한 것 때문에 내시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의 행동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빌립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일을 하면 그 일의 결과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으로 모아지기를 원하는 우리의 욕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빌립처럼 사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이 드러나는 쪽으로 되어지지 않고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괜히 이렇게 했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을 내시에게 보내신 것은 내시를 위한 것이지 빌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귀해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성령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이익을 따져가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해봐야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 것 같지 않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드러날 일에 관심을 둔다면 그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라 일할 뿐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 생각합니다. 주님만 증거되어 진다면 나를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그것은 관심없다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