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9:1-9 찾아오신 예수님

여러분은 기적을 체험한 신자와 체험하지 못한 신자가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겠습니까? 어쩌면 기적을 체험한 신자를 더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인식이 그런쪽으로 깊어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기적을 체험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이어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까지 체험하게 하신 것은 그가 특별하기 때문이고 특별한 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체험이 없이 밋밋하게 신앙생활하는 것보다는 하다못해 기도해서 감기라도 낫는 정도가 되어야 믿는 재미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믿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처럼 믿게 되어야 믿음에 폼이 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울처럼 불렀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에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믿게 된 것이 아니면 어쩌다 믿고 싶은 생각이 나서 여러분 발로 교회를 찾았거나 아니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가 교회 가자고 권유해서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사울을 바라볼 때 조금은 사울이 부러워지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도구나 아니면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에 있어서 보조수단일 뿐이지 기적이 믿음의 본질이나 중심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처럼 사울이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사울이 오늘 우리하고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구별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행적이나 업적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큰일을 하시려고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바울을 찾아오시고 믿게 하셨는가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행한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1-2절에서 말씀하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도 바울은 절대로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증거했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주동자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부지런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과연 그가 예수님을 믿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겠습니까? 아마 '저 사람은 천하없어도 믿을 사람이 아니다'는 굳은 생각만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특별히 대단하게 쓰시기 위해서 직접 음성으로 바울을 부르시고 그를 붙드시는 방법을 동원하신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일에 대한 의지와 열심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회사가 다른 회사의 직원을 스카웃 할 때 그 직원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높은 사람을 파견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의 특별한 경험만을 생각하고 바울을 우리와 다른 대단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이해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지적으로 다른 차원의 성경을 쓴 것은 바울에게 그만한 신학적인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은 바울의 그러한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서 특별히 바울을 부르신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자체를 차별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시에 지적인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분명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와 사도들이 쓴 성경을 보면 뭔가 지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사도가 기록한 성경보다 더 낫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은 지식으로 사람을 구별하여 쓰신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사울은 예수의 도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붙들어 오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도, 즉 복음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때까지 사울이 이해하는 복음은 율법을 행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고 성전이 없는 이방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빛이 비췬다면 결국 유대인들의 자존심인 율법의 의미와 성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아래 들어와야 하고 성전의 제사에 참여해야 마땅한데 그런 것 없이 구원의 빛이 비췬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믿음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도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명확해졌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의 집이기에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는 것이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공간에 갇혀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을 향해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로 지칭하였습니다(7:51). 이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즉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스데반의 설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도였고 복음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그 도를 싫어하고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도를 좇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았던 것이고, 예수님을 그것을 두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를 좇는 자를 핍박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탄압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까?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붙잡아 핍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중동의 어떤 나라처럼 예수를 믿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 그것이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하고 성경 자체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핍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도를 핍박한다기보다는 예수를 믿는 수단이고 방법인 교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고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차원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핍박은 그러한 차원이 아닙니다. 사울은 예수의 도 자체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의 도가 자신들의 성전을 거부하고 율법의 행함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를 핍박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못나가게 하고, 교회에 와서 훼방을 하는 차원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과 의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예수님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된다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는 길로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나, 현대교인들이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전에서 제시를 드리면 그것이 곧 복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나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복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현대 교인의 사고방식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곧 예수님의 도와 배치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고 다시 부활하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고 했고, 이것은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이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십니다. 결국 그것은 사울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고치시고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완악하고 목이 곧고 자기 고집으로 살아가며 나이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하늘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오늘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결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의 체험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그러한 체험을 이유로 해서 사도 바울과 우리 자신을 차별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붙드시지 않으면 안될 완악한 자였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붙드시고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나를 교회 다니게 하신 것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 밖에 안되었던 본래의 내 상식을 버리게 하시고 내 생각을 고치셔서 예수님의 도를 좇게 하신 그 능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