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 9:19-30 바뀌어진 사울로

사람은 자신이 영향력있는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출세와 연관된 것이지만 교회에서의 인정은 분명 출세와는 연관되지 않습니다. 대신 자존심과 연관될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내가 영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오는 만족감을 즐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건이 되고 힘이 있는 사람은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이 교회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부지런히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 열심히 일합니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말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동원해서 스스로를 분발하도록 독려하고 힘을 내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성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와 똑같은 성경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그러한 교훈을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하고, 항상 분발하는 신앙생활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활동을 얘기하면서 바울처럼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귀에는 그러한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똑같은 성경을 보는데 각기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물론 성경을 이해하는 내용은 다르다 해도 가는 길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길을 가면서 한 사람은 꽃을 볼 수가 있고 한 사람은 새를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길을 갈 때 보이는 것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주의깊게 살피며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이러한 것에 골몰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을 보면서도 바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고 활동하는 바울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바울처럼 열심히 전도하자라는 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잘못 대하는 대표적인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이제는 오히려 예수님을 전파하는 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울의 변화에 대해서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울이 변화된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더 힘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사울이 이제는 오히려 유대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할 때 사울은 제자들에 의해서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을 탈출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때부터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로 가득찬 것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그만큼 일을 많이 했고 교회사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사람되기를 소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 바울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려지고 사람이 증거되고 드러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채 보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전혀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 사람에 대한 것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바울은 결코 내가 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바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득불 하게 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바울이 스스로 자기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도 바울처럼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자'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없는 말을 더한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라는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에게서 사람을 본다면 결국 하나님은 보지 않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려질 수밖에 없고 오로지 사람의 소리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시작부터가 순탄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면 복을 받아서 그 인생이 더 순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연관된 인생으로 뒤바뀐 바울은 시작부터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 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조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배척받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해도,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으며 '당신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니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힘이 납니다'라는 격려를 받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신자들에게는 의심과 오해를 받고 유대인들에게는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바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봄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때로는 괴로운 인생이 될 수 있고 고통을 받는 인생이 될 수도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예수님을 모르고 핍박하는 사울로 살았다면 본문과 같은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으로 남을지언정 자기 행동에 대한 의심과 오해를 받을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삶을 결코 편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편하게 살았을 인생이 예수님 때문에 고통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내어 버려두십니다. 그가 악함 가운데 살아가도록 그냥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어 버려두신다는 것 때문에 그 인생이 편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곧 삶의 편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내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간섭을 하심으로써 죄에서 나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그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곧 고통으로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때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세우셔서 그를 사용하실 때, 그 삶을 고통스럽게 하셔서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 보이게 하심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자기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핍박과 상관없이 편안한 자기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관됨으로 인해서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고 그 결과는 예수님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연관된 인생을 핑크빛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인생이 복을 받고 잘 될 것만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지를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의와 악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의와 진리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의심을 받기도 하는 것이고 때로는 나를 몰아내고 거부하는 소외감까지 당할 수 있는 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세상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예수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부터가 이미 잘못된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는 것, 이것부터가 예수에게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복받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본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생각할 것이고, 이미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았다면 그 마음에 부족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받다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의 자리이고, 멸시와 의심과 오해의 자리입니다. 주님을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러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크기에 설사 내가 주님으로 인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사랑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부름을 입은 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을 그러한 삶으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있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나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바울과 같은 삶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저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