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9:23-31 평안과 든든함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관심이 될만한 것은 '수가 더 많아지니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교회부흥을 소망하는 사람에게 이 구절은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부흥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하면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람이 한 방법대로 시행해보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훈련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해서 많은 돈을 들여 제자훈련하는 방법을 교육받고 그 방법대로 해보고 잘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31절의 구절이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즉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므로 수가 더 많아졌다고 했으니까 부흥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평안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평안한 것이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는 길이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면 교회는 부흥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교회가 평안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가 교회의 평안을 분란이 없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즉 교회가 분란이 없고 다툼이 없고 서로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는 그러한 것을 평안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좋아하고 결국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 부흥을 위해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얘기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31절에서 말하는 교회의 평안과 든든함이라는 것이 과연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목사로서 교인수가 많아지고 그로인해서 재정적으로도 탄탄해지고 교인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잘 섬긴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목사의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목사의 욕심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지 교회의 부흥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사람수가 많아진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수가 많아지건 작아지건 거기에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신자를 자기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신자는 목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흔히 신자를 목사의 양이라고 말하지만 목사는 신자의 유일을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신자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것이 목사의 본분인 것입니다.

신자의 유익을 염두에 두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한다 할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신자의 유익을 염두에 둔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고 말하지만 당시 초대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안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 교회가 힘을 얻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성장해 가는 그런 결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힘입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교회가 핍박을 받고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리는 고난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은 고난과 고통이 없는 편안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31절이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음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이런 일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어떤 일로 인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이 교회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거나, 서로 사랑했다거나, 봉사를 했다는 것으로 나오지 않고 사울의 고난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이 예수를 믿음으로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전에는 같은 형제로 지내던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26절에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였지만 다 두려워하여 사울이 예수의 제자된 것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전만 해도 예수 믿는 자를 죽이고 잡아 가두기 위해 살기 등등하여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쉽게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예수 믿는 자를 색출하기 위한 위장술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바나바가 사울에게 주가 나타나신 것과 사울이 주를 믿게 된 일을 해명함으로써 겨우 오해가 풀리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예수에 대해 말하며 변론함으로써 다시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힘쓰게 되고 사울은 다소로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 나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당한 죽음의 위기들과 고난들로 인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울이 당한 고난들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31절의 말씀을 우리 생각을 따라 멋대로 추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답을 찾고 그 답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진다면 은석교회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로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31절의 말씀을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 뒤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는 말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는 것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사울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살았고, 그것이 곧 교회로 하여금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고난과 어려움이라는 것이 비록 우리들에게는 싫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사실 신앙은 고난과 어려움에서 증거 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앙은 증거되어 질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의 징벌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신앙의 꽃이 피고 증거되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고난을 막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편안함과 좋은 환경이 계속 이어지고 점차 더 좋게 나아지기를 위한 신앙 아닌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되게 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형편과 환경으로 밀어 넣으신다고 해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힘 앞에 굴복하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수시로 절망과 낙심의 현장으로 밀어 넣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들을 통해서 세상은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살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붙들려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과 어려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생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자가 신앙이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배우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이런 저런 쓴맛을 겪고 만남으로써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입장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 뭔가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뭘 받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십일조입니까? 십일조를 받으시기 전에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받으실만한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됩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일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도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주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위로는 고난과 고통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낙심과 절망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의 위로입니다. 비록 육신은 고통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을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고통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천국으로 이끌어가실 것임을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위로인 것입니다.

고난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남는 것은 낙심과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돈이 든든함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얼마든지 평안함과 든든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말하고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가 늘어갔다는 것은 교회 부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에서도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지 않은 이상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가 늘어갔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분명 고통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면 고통속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도 그 시작부터가 고난이고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 때문에 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가 사울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든든함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만나시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있던 것을 없게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실망과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주를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평안하여 든든하게 서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안과 든든함이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