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9:32-43 애니아와 도르가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고치시고, 병들어 죽은 도르가를 살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주를 안믿었을 것인데 베드로가 기적을 행해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하니까 일이 되고 안하면 일이 안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배제해 버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것이지 거기에 사람이 개입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끼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끼여들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끼어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능력이나 생각을 갖고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반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열심히 해야 일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전도를 해야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이 전도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뜻이 되버립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일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사람에게 일을 맡겨 놓고 일을 잘하나 안하나 보면서 일을 잘하면 안심하고 안하면 전전긍긍하는 그런 분으로 여겨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하십니다. 인간의 힘을 빌려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들을 스스로 다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신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라는 반발이 생길 것입니다. 평소에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반발이 더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부지런을 떨었던 자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었던가?'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가?' 여기에 대해 깊이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갔으니까 애니아의 병이 고쳐지고 죽은 도르가가 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베드로가 안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죽었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문제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면 안됩니다. 애니아나 도르가가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드로를 내세워서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과연 그 기적이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느냐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애니아와 도르가를 살리기 위해서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내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룻다와 욥바의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시고 기적을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심을 베드로에게도 기적에도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사건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는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애니아와 도르가가 살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들이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했다거나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았다더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고침받고 살았다고만 할 뿐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더욱 예수를 믿었다'고 말한다면 '그래 그런 기적을 체험했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생기겠지'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믿음을 위해서 체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기적을 일으킨 사람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만약 은석교회에 그런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대하는 여러분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래 평소에 그렇게 믿음이 좋더니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그 사람의 신앙을 칭찬하면서 모든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서 애니아와 도르가는 마치 엑스트라처럼 보여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적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식으로 그들을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들을 보면서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의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도르가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그가 평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본다면 도르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원상회복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다시 살아났을 때의 얼굴이 죽기 전보다 더 예뻐졌다던가 더 젊은 모습이라든가 뭔가 더 좋아진 모습으로 살았다면 죽었다가 산 것이 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도르가는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 도르가에게 주어진 이익은 무엇입니까? 다시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살았으나 결국 다시 죽어야 할 몸 그대로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죽게 놔뒀으면 천국에 편히 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지만 나사로는 살았을 때의 몸 그대로 산 것입니다. 다시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베드로의 기적은 애니아와 도르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가게 하고 주를 믿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어 그러한 기적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기적을 체험했다면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네가 믿음이 좋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너에게 주셨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기적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함으로써 나를 주께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두고 사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주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고 고통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모습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일을 겪는가로만 보지 마시고 다른 신자들을 통해서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서 간섭하시는 일들과 여러 가지 부딪히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라고 불평하고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일을 맡겼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께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물론 맡은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부지런히 해서 뭔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아는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자연히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사건들을 대할 때 너무 성급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좋아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급함을 수시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 한 몸이 편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입니다. 서로 유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고난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내 믿음의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형제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위한 일로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베드로의 입장이고 애니아와 도르가의 입장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는 여러분을 고달프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심령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더 깊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의 심령이 주를 향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