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10:1-16 고넬료와 베드로

믿음은 그리스도와 나를 하나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것만을 옳은 것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고쳐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전의 내 것을 고수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단지 종교일 뿐이며 자기 구원을 위해서 구세주라고 말하는 예수를 자신의 삶에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기 것을 고집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가면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내 속이 채워지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이 버려지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새롭게 채워지는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내 생각에 맞지 않는 말은 무조건 틀린 것으로 배척을 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 자기 신앙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안하면 틀린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기 생각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기 신앙을 고집하는 한 사람과 그를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아주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인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고넬료를 보면 그는 로마 군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란 지금의 군대로 말하면 '중대장'급의 계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넬료는 결코 낮은 계급의 군인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체면에 크게 손상이 되고 출세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2절에서 말한대로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한 고넬료에게 나타나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서 베드로라는 사람을 청하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자연히 초점이 고넬료에게 가게 됩니다. 고넬료가 경건하여 구제를 많이 하고 항상 기도하였다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넬료를 구원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기도하고 구제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고넬료의 그러한 행위를 하나님이 높이 보셨음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소 하나님에 대한 고넬료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는 고넬료를 내세워서 베드로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전에 엘리와 사무엘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사무엘에게 어떤 일을 맡기기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엘리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즉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끝났음을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엘 리가 제사장이었고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엘리를 부르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엘리가 아닌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은 결국 엘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라면 고넬료를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고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먼저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고넬료애게 가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치셔서 고넬료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9-16절을 보면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뭔가 먹고자 할 때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그릇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외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13절)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4절)고 말하면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다시 하늘에서 외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절)고 하고,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안에는 평소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규범한 것들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전부터 해오던 대로 부정한 것은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만 본다면 하나님은 마치 베드로가 부정하다고 여기는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즉 부정하다고 여긴 음식을 먹지 않는 것보다 먹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릇을 내리시는 일까지 하시면서 베드로로 하여금 부정하다고 하는 음식을 먹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먹든 안먹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돼지고기를 먹든 안먹든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믿음이 있고 먹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이런 지엽적인 싸움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기도 하고 싸움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교회에서 이런 음식 문제로 다투게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예로 주일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주일에 대해서는 크게 두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 규례처럼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 규례는 구약으로 끝났으니까 주일을 따로 지킨다는 것은 신약에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서로 주일에 돈을 쓰는가 쓰지 않는가? 주일에 음식을 사먹는가 사먹지 않는가? 라는 싸움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둘 다 잘못된 것으로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일에 돈을 써야 하는가 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돈을 써도 된다고 하는 것이나 쓰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나 똑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기 신앙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을 서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가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베드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신앙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워왔고 알아왔고 몸에 배인 자기 신앙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강요할 것이고, 만약 먹는 자는 신앙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음식을 구분하는 베드로에게 로마인은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는 것이 베드로의 신앙이었습니다. 마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아무리 고넬료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해봐야 베드로는 자기 신앙으로 그 사람들을 거부할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신 자를 사람이 자기식의 신앙을 고집하며 거부할 수가 없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부정한 것을 담은 광주리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하나님이 그의 구제와 기도를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넬료의 행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넬료를 용납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납한 사람은 자기 신앙과 고집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신 것을 자신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온 환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 식의 자기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신앙으로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나에게 보내신 형제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더러운 사람을 위해서 피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자기 신앙을 내세워서 더럽다, 악하다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욱 더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하라'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신앙으로 끌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의 신앙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거나, 주일에는 돈을 써라 말라라는 식의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신앙을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보다는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식의 신앙을 버리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