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10:17-23 고넬료와 베드로(2)

신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는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잊기 쉬운 것은 우리 자신이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과연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온전한 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고넬료와 베드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베드로는 과연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고자 하십니다. 베드로를 보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의 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에 있어서 베드로는 하나님께 쓰여지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온전한 도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는 아직까지 율법적인 구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깨끗하고 이방인은 더럽다는 구별의식이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그와 같은 율법적 의식이 남아있었고, 때문에 고넬료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문제 있는 도구였을 뿐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도구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 도구가 원하는 일에 쓸 수 없도록 망가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버리겠습니까? 무작정 버려 버리고 새것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도구를 고쳐서 쓰시겠습니까? 답은 후자일 것입니다.

물론 아예 쓸 수 없을 정도로 고장난 것이라면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아예 쓸 수 없을 정도로 고장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 말은 신자가 무슨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신자는 복음을 알고 성령이 함께 한 존재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자는 고치면 고쳐지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사건과 말씀으로 인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과 틀린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안 것으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모두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내가 무슨 일을 할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나설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도구로 쓰여지기에는 아직 문제투성이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복음을 안다고 하는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에 쓰여질 수 없는 문제있는 도구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치시기 위해서 율법에 부정하다고 명시한 짐승들이 담겨 있는 그릇을 내려보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 대해 먹을 수 없다고 거부함으로써 복음을 위하여 쓰여질 수 없는 문제 있는 도구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방인을 더러운 자로 여기는 옛날 사고방식이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위한 도구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고쳐 가시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는 도구라는 말은 서슴지 않고 하지만 내 자신이 과연 온전한 하나님의 도구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과연 하나님의 일에 쓰여질 수 있는 도구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이기에는 부족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도구로서 부족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고쳐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시고 어려운 일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열심히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 즉 더 기도하고 더 충성하고 더 열심히 헌금하라고 나를 힘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고쳐 가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두고 생각만 해도 하나님이 고넬료의 집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번거롭게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게 하시고 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시는 일을 거치지 않아도 직접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베드로말고 이방인 중에서 복음을 아는 사람을 보내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번거롭다고 할 정도로 여러 과정을 거쳐서 고넬료의 집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안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말을 하면 대개 하는 말이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되는가?'라는 반문을 합니다. 이러한 반문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일의 결과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라고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실 수가 있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결과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내가 안해도 하나님이 구원시킬 수 있는데 내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일하시거나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앞서 말한대로 번거롭게 여러분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말씀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여러분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던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성령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베드로가 그들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그들을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성령이 개입하셔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일이 생략되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이 인간의 일이 생략된다거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일해야 일이 되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우리가 행동해야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느냐 되어지지 않느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쓰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를 고쳐 가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 이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이웃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에는 너무나 문제투성이인 우리 자신을 고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거쳐서 신자는 스스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보내었노라'고 하십니다. 과연 누가 목표입니까? 바로 베드로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꺼려하고, 무시할만한 사람을 내게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여러 이웃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문제가 되는 이웃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제투성이인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누군가를 탓할 수가 없는 것이고 바로 나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이 삶의 지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의 결과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 많은 결과가 없을 때는 실망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는가를 생각하며 실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일의 결과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고쳐지고 달라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가 있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봉사하게 되고 섬김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열매는 고쳐지고 달라지는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