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10:23-43 외모를 취하지 않음

복음에 대해서는 알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가 봅니다. 물론 지식적으로는 얼마든지 알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머리에 기억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고 순종하느냐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안다'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나의 삶이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가장 예수님을 잘 따른 척 행동했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그 모든 능력이 주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외쳤던 것입니다. 과거의 베드로였다면 분명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게 된 베드로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리자 그를 말리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 전혀 가치를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을 높이는 사도이며,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어떤 사고방식이 있었습니까?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 알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가 보다는 말로 오늘의 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해 알았으나 우리에게는 사라지지 않은 죄의 본질이 남아 있고, 우리의 습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본질과 습관들이 내 머리에 있는 복음으로 깨어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때 우리의 입에서는 복음에 일치된 말이 나올 수 있으나 행동은 전혀 복음에 맞지 않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함께 오긴 했지만, 앞에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내려보낸 그릇에 담겨 있는 부정한 것을 먹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베드로 쪽에서 더럽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넬료를 통해서 사람을 보내시고, 또 다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고치시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과 성령의 수고로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오긴 했지만 아직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의식은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28-29절에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라는 베드로의 말을 보면, 자신이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셨기 때문이지 자신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유대인이 이방인인 너희와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셨기 때문에 온 것뿐이라는 의도의 말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가 고넬료가 자신의 발 앞에 엎드릴 때 '나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니까 나에게 엎드려 경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이방인에 대한 구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데, 정작 베드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율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베드로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에 의해서 이방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베드로가 자신을 사람이라고 하면서 낮추는 모습은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이 있었을 때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방인에게도 '나도 사람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는 부정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복음을 안다고 해서 모든 행동과 삶이 복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나도 사람이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를 두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말하는 사람치고 일의 결과를 두고 '내가 했다'고 큰소리치는 뻔뻔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개는 겸손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를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하나님을 말한다는 증거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사람이다'는 말은 '너나 나나 같은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존재라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구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그러한 말을 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과 사고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입술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해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도 사람이다'고 말하는 것의 모순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죄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합니다. 날마다 죄만 짓고 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삶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면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은 잘 알 것입니다. 어떤 행동으로 인한 죄이든 죄에 있어서는 경중이 없고 동일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든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든 그리스도 앞에서는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신자가 모인 교회라면 필히 구별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교회의 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신보다 못한 이웃이 있을 때 구별이 보여지고, 무시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결코 죄인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믿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웃에 대해서 구별의식을 보였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라는 판단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알고 있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고 말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에 순종하며 살아가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받으신다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자신을 왜 불렀는가 물었을 때 고넬료는 천사가 나타나서 지시한 내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다'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방인의 구제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받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노라"(34-35절)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번거로운 여러 과정이 거쳐지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과정들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성령이 개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의 입술로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베드로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볼 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깨달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다만 '예수 믿으라'는 말을 열심히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후에 우리가 알게 된 그분을 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말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의지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해봐야 결국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식의 전달로 그쳐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증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삶을 동원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머리로 알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삶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생각하는 것, 살아가는 것이 과연 믿음인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님을 아신다면, 여러분에게서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보여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것은, 여러분 역시도 고침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해서 즉시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침 받고 새롭게 되어짐으로서 증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날마다 말씀으로 깨달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고 사랑이라면, 여러분이 미워하는 자 예수 믿을 리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이 주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구분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보며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은혜의 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