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10:44-48 성령을 받았으니

현대 사회에서의 교회를 보면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보다는 사회에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교회를 굳게 세우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교회가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사회가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면 사람들을 교회로 나오게 하는데 좋은 현상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아 교회가 저런 좋은 일을 하는구나.'라는 말은 들어야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교회 나가볼까?'라는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이러한 말이 일리가 있고, 또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성경에는 이러한 교회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께 무엇을 판단하든 성경을 기준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라면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버리지 말고 취할 것이며,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리 옳아 보이고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신앙의 굳건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교회가 전도를 위해서 사회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교회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 백번 천번 옳은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성경에서 그러한 교회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어찌합니까?

교회가 사회에서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로부터 나쁜 평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의 사명이라고 여겨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것을 아니까 사회에서 봉사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사회에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과는 하등의 연관이 없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인해서 모여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복음을 말하고 복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복음에 이끌려 모여진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였을 때는 그리스도를 얘기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나누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된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교회는 교회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얘기하기보다는 교회의 사업과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더 즐기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하는 소위 사회 봉사, 또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즐기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아주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신앙으로 여겨지고 있고, 교회다운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보려거든 그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죄인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높이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교회 되어지는 조건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도 다른 조건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한 인간을 주목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중심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인 것입니다. 누구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믿음으로 모인다면 그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하고 있고, 교회안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라는 것은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나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속에 있는 종교성이 채워지지 않고 만족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다른 일이나 행사로서 채우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여러 가지 조직을 세우고, 이런 저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종교심을 충족시키고 즐기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고 세상에서 어떻게 죽으셨는가에 대해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내려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어떤 구별도 없이 복음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된 교회,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 여러분 자신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외모를 보지 마십시오. 외모를 보면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교회를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얼마나 하는가?' 외모를 보면서 교회됨을 즐기려고 하지 마시고, 과연 이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며 살아가는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복음을 들은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았다는 뜻이 됩니다. 도대체 어떤 현상이 있었기에 성령이 부어진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신 것처럼 비둘기같이,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부어짐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고넬료의 집안에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46절을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말합니다. 당시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떤 말을 하게 되었느냐가 성령이 부어진 증거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방언이란 현대의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만 그 내용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방언의 특징인 것입니다. 방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방언 자체가 하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늘의 말이라는 것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 이런 식으로 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늘의 얘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 얘기가 아닌 하늘의 얘기를 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부어진 증거이고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의 기준은 그리스도이며, 누구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가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보여질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참된 교회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은 삽입시켜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뭘 해야 한다느니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이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맙시다. 다른 교회가 뭘 어떻게 하든 그것에 마음 끌리지 말고 '나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하는가?'를 살피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의 통일성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부음을 받은 신자에게는 내 교회 네 교회가 없습니다. 내 교단 네 교단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은혜가 희미해질 때 우리는 교회를 보게 되고, 교회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자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의견으로 부딪히는 것도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만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혜를 말하면서 말할 수 없는 사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는 염려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담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교회일, 세상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사랑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리스도를 보시면서 그 앞에서 과연 교회가 크게 되고 잘되는 얘기를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만남은 이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하시고 항상 복음안에서 하나되고 통일된 교회로 굳게 서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