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1:12-14 기도의 사람

사도행전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나라의 일과 성령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가십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그 시작부터 성령이 오시니 일이 되어지더라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실제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써 방언을 하게 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설교를 함으로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에게 역사하심으로 능력적인 일들이 보여진 것으로 인해서 마치 성령만 임하면 모든 일이 되어질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성령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성령 이야기는 성령이 오시기만 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 받기 위해서 힘쓰라는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령이 오시면 신비한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분명 그것은 종교적 측면에서 능히 기대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성령의 오심과, 신자의 신앙이 무조건 능력을 받자는 쪽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초림)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승천 이후에 성령의 오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뭔가 임무 교대와 같은 느낌을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시기까지의 일에 있어서 제자들의 역할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 홀로 이루셨고 제자들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을 친 모습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외치셨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모든 일을 예수님 홀로 담당하셨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의와 구원 앞에서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성령이 오십니다. 왜 오시겠습니까? 물론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처럼 홀로 모든 일을 담담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신자와 함께 하심으로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만 오시면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다 되어질 것 같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어떤 일로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부르시고 그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성령이 오신 일 사이에 1:12-26절의 말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다는 것과 함께 맛디아를 제비뽑아서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하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이 언급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본문의 구조는 그런 오해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고 있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고 말씀하니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생각을 가질만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기도는 대부분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즉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내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서 기도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가 말하는 소위 기도제목을 보면 모두가 인간 편에서 원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게 해주시고, 가정이 평안하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아이가 잘되게 해주시고,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시고, 나라가 통일되게 해주시고' 이처럼 뭔가 해달라는 것이 기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생각이고 수준이다 보니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뒤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기도해서 성령을 받는다면 결국 성령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성령이 오시는 대상이 결정되어진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이 말씀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성령의 오심을 말하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사실 이러한 내용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성령이 오기까지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만 이해해도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고 말하기에는 본문의 구조가 그리 간다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1: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본문 13-14절의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은 단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보다는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신비한 힘과 능력이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늘의 일을 마음에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됨의 의미가 성령이 오심으로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 됨의 의미, 신자 되었다는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성령을 받았느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이지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또는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느냐라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의 것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 역시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교회 다니게 하시기 위해서 신자를 있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 속에서 성령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모든 일을 육신의 것으로 이루고자 합니다. 육신의 것이 곧 힘이며 능력이고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고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사람은 육신의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은총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것을 힘으로 사지 않을뿐더러 육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을 증거하지도 않는 사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 의미를 성령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은 자기들의 육신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를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도 방법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이며,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해주십시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자기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자입니다'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의 내면에는 내 스스로 참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은 하지 않고 참된 기도가 되어질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기도를 이뤄보고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내용을 바꿈으로서 참된 기도를 해보려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속은 검은데 겉만 흰색 칠을 했다고 해서 전부가 흰색은 아닙니다. 겉만 하얗게 보일 뿐, 속은 검은 색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배우면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잘못된 것을 제하고 옳은 것을 채택함으로서 옳은 사람으로 존재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할 때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그러한 기도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안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신자가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나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세상 것보다 더 놀라운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살라고 부르신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속 심령으로 알아갈 때 자연히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지금 있는 것에도 더 요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이 아닌가라는 깨달음이 있기에 세상 것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옳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심은 속에 그대로 남겨둔 채 겉으로만 욕심을 가리는 것일 뿐, 세상 것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옳은 기도를 하려고도 하지 마시고,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이러한 기도는 잘못된 기도니까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여러분을 영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영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성령에 의해서 옳은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말씀드릴 뿐,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은 안하려고 합니다.

신자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신자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의 사람이란 세상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사람인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지 내가 되고자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도 이기며 위대한 일을 해낼 수가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 것으로 자기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신을 찾는 일에 부지런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기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 힘과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것도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아닌 영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이나, 예루살렘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은 모두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할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할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세상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세상에서 자신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장애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옛사람이 나 자신이 주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세상보다는 하늘의 일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한 자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이기에 신자는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