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11:1-18 성령을 받았으니(2)

10장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자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보임으로서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고 성령 받은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게 됩니다.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베드로는 세례를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람, 즉 자기의 형제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이유는 무할례자의 집, 즉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들에게 그간의 경과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준 환상에 대한 얘기, 성령이 자신에게 지시하신 얘기,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지시한 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성령이 받은 얘기를 하자 베드로에게 시비를 걸던 사람들이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이들이 베드로의 얘기를 듣고 깨닫게 된 것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절)는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구원을 주셨다면 이방인에게 들어가서 함께 먹었다는 것이 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책망하던 사람들이 이토록 마음을 바꾸게된 이유는 이방인도 성령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16-17절을 보면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고 말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고넬료에 대해서 같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을 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고넬료를 받아들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말하면서 잠잠해 진 것을 보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한 일로 여겨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을 보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 대해 시큰둥해 하는 것을 많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오셨다고 해봐야 자신에게 일어난 구체적인 현상과 증거가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생긴다거나, 기도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거나, 뭔가 평소와 다른 신비한 힘이 생긴다면 모르겠는데 전혀 그러한 현상이 없고 보통 때와 다를 바 없이 힘든 것은 계속 힘들다는 것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분위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성령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루이틀된 관습이 아니라 수백, 수 천년을 내려온 법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구별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했던 그들의 관습도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오셨다'는 한마디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고넬료가 이방인이다'는 이유로 인해서 함께 하지 않으려고 했고 함께 한 사람까지 책망하였는데 성령을 받았다는 것 하나로 자신들과 함께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굉장한 일로 여겨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나 성령을 줄 수 없고,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받게 된 것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선물과 같은 선물을 받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들의 관습과 법으로써 그들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자신들이 지켜오던 관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을 때 흔히 생각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는 것에 그 증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방언이란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언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말의 내용이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의 방언과 지금의 방언을 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의 중심은 구별입니다. 세상과 하늘로 구별하는 것이 방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일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이 곧 하늘의 말을 하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하늘에 대해서 얘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말을 한다면 그는 성령이 함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사라져야 하는 것은 구별이고 내 자신의 감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도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고 다툼이 있고 구별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랑한다고 해봐야 나와 감정이 없는 사람이 대상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감정이 있고 미움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척 할 뿐이고, 내 안에 있는 가시를 감추고 있는 것뿐이지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것이 보여지는 것은,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는 자신의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세상보다 하늘에 더 소망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여러분 자신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설령 수 십년동안 미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인다면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의심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미움의 감정이 '저 사람이 예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는 생각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어떤 사람도 회개케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17절에 보면 베드로는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할 뿐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감정으로 만나고 교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생명의 회개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생명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 안한 것, 교회에 빠진 것, 십일조 안한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러한 것은 생명의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러한 회개를 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회개란 나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회개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회개인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쓸모 없음을 아는 회개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회개를 하는 신자라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 누군가를 구분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악이 된다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연히 성령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과 미움은 다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된 회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회개는 분명 그 열매를 드러낼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열매를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다짐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 개인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에게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 형제를 내가 내 감정으로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하나님이 형제되게 한 사람을 우리가 구별하고 밀쳐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서도 성령이 함께 한 증거를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고 다같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교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