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11:27-30 그리스도인(2)

신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세상에서의 편함을 보장받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환난과 고통에서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신자로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를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에 빠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힘든 것을 즐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자로서 중요한 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신자다운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세우신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든 부할 때든 힘들 때든 편안할 때든 신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신자된 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갑자기 '흉년'이라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27-28절을 보면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고 말합니다.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루살렘 교회가 그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고 바나바는 다소에서 사울을 데리고 와 안디옥에서 무리들을 가르치고 비로소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는 것은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신자답다'고 칭찬해주는 의미로 보기보다는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에게만 마음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뭔가 조롱이 섞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는데, 본문에서는 갑자기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되고 그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으로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글라우디오'라는 로마 황제 때 실제로 실현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갑자기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되고 안디옥에서 흉년을 예언을 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흉년에 대해 예언을 할 목적이었다면 예루살렘에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흉년이 안디옥에서만 일어난다면 안디옥에 와서 안디옥 사람들을 향해서 흉년이 임할 것을 예언했다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흉년을 예언하고 실제로 흉년이 실현됨으로서 하나님을 안믿는 안디옥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가보는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천하라는 것이 전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안디옥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안디옥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을 했다는 29절의 말씀을 보면 흉년은 안디옥만이 아니라 유대,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가 참 애매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몇 절 안되는 내용이고, 단지 흉년에 대한 예언과 실현에 대한 기록으로 보고 넘어가 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저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가르침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본문의 내용이 애매하다는 것은 단지 흉년에 대한 예언을 하기 위해서라면 선지자가 안디옥에 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흉년은 예루살렘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도 얼마든지 예언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안디옥에 와서 예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흉년에 대한 이야기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는 말씀 뒤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 볼 때 저는 흉년에 대한 예언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것과 연관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는 29절에 있다고 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갑자기 흉년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신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편함을 보장받는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세상에 당하는 어려움에서 특별히 제외시키는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홍수가 났을 때 신자의 집은 멀쩡하고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핍박한 사람들의 집들만 골라서 망가지는 일은 없습니다. 가뭄이 들어도 신자가 불신자 가리지 않고 똑같이 가뭄이 듭니다. 본문에서도 흉년이 들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자니까 하나님이 봐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힘든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는 신자니까 좀 봐주시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흉년이든 홍수든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턱대고 심심해서 흉년이 있게 하거나 홍수를 일으키는 분이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에게 똑같이 흉년이 있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신자다움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흉년이든 홍수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세상은 아무일이 없고 편안할 때는 하늘을 잊고 삽니다. 그런데 흉년이나 홍수 같이 인간의 힘으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닥치면 하늘을 원망합니다. 하늘을 잊고 살다가 힘드니까 하늘을 생각하게 되는데 결국 보여지는 것은 원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치도 아니하는 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평소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흉년이든 홍수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고 있으며 일부러 우리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님을 압니다.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힘든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로 인해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별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밖에 모른다는 의미로 일컫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말한다는 의미의 칭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분명히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가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는 안디옥에 와서 흉년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부조라는 것은 봉사한다는 뜻의 말입니다. 즉 흉년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유대의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물질을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디옥은 흉년을 당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도 같이 흉년을 겪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제자들은 유대의 형제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임이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흉년이 있게 하셨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 맺어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매를 증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갈 때 그것이 어떠한 열매로 맺어지는가를 증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나의 말로 인해서 마치 내가 그리스도만을 귀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고, 그리스도만을 높이자고 외침으로써 '저 사람은 예수만 생각하는 사람이다'는 일컬음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있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볼 기회를 본문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제자들은 흉년에서도 유대의 형제를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모른다는 것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편안할 때는 형제를 말하다가 내가 사는 것이 힘드니까 우선 나부터 챙기자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을 과연 그리스도 밖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그리스도를 바르게 말하는데는 힘썼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처지와 형편이 형제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막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나의 처지와 형편이 그 마음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과연 내 속에서 형제를 도와줄 마음을 막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힘들고 어렵다는 이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만으로 사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과는 거리가 멀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은 쉬우나 그 열매가 맺어지기에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은 열심히 하지만 그 열매를 맺기에는 거부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가는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성령은 우리를 이러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