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11:25-30 그리스도인(3)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오늘 한 주간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안다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가 곧 그리스도인으로 사느냐 아니냐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을 아무 생각없이 남들 사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죄만 있는 이 세상에 남겨놓고 계시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그 뜻을 따라 살기에 힘써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고 확인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실현되기를 기도하며 힘써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특별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또는 세상이 어떤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살아가는가?와 상관없이 항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쓸모없는 우리를 택하여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흉년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흉년이라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일컬음 받았던 제자들이 형제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우선이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기 바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 받는 제자들은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해 그러한 행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흉년이라는 상황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7-28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고 말씀합니다.

아가보란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천하라는 것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의미도 되겠지만 더 큰 의미는 지역적인 범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흉년을 의미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흉년인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환난과 고통에서 예외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흉년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흉년만이 아니라 홍수가 난다고 해도 역시 동일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흉년이든 홍수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문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흉년을 당하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데 왜 신자도 함께 흉년이라는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안디옥의 제자들도, 그리고 유대의 제자들도 흉년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이시간의 중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이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생을 얻는 것을 예수 믿는 이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여러분에게 다만 지식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은 바른 답을 가지고 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는 성경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데 왜 남들과 같이 흉년이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합니까?'라는 불만이 은연중에 살아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챙겨서 자신을 의인화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화하게 되면 그렇지 못한 사람과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흉년을 주시는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그 뜻을 다 이해합니다. 고통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 다 압니다. 그러니까 고통을 주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증거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세상에서의 보상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가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다는 것보다 기분좋고 기쁜 것이 없으며, 이런 신자에게 애통할 수밖에 없고 근심되는 것은 세상의 삶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면서 안디옥의 제자들과 유대의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은 일부러 그들을 고생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절대 아닙니다. 또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벌을 주는 차원에서 형벌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을 똑같이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흉년이라는 나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증거하심으로써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세상의 악함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제자들은 흉년이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하나님만 믿었고 복음만 전했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불평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 형제들을 위해서 부조를 하는 그들의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평을 가지고 있었다면 형제들을 위해 부조하지 않습니다. 흉년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이 변함이 없었고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에 나보다도 형제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이것을 모릅니다. 세상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의 고통과 환난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있게 하기 위해서 믿음이 주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은 다른 사람은 다 흉년에 처해서 어려움을 받는데 나는 흉년도 피해가더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흉년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니까 흉년에 처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더라, 주님의 고통을 더 생각하게 되더라'는 이것이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마지막, 즉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현재에 서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서서 현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오늘 현재를 살아도 그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나 나의 기쁨을 위해서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싸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흉년이라는 상황에서도, 그리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기 위해 자신과 싸우며 주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서 구별된 자로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일의 도구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편하고 좋은 곳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과 억울함이 있는 곳이 세상이고, 때로 예상치도 못했던 좋지 않은 상황에 빠지기도 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흉년이 들면 흉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이 증거되어야 하고, 실패했으면 실패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에 복종해야 하는 싸움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이 다 이렇게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신자는 그리스도께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물으면서 나아가야 할 삶의 길이 결정되어야 하고 그 길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