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12:1-10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다'는 것을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교회 됨이 무엇이며 교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교회의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적인 능력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의 능력은 세상 안에서 누구도 감히 건들 수 없는 힘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큰 교단이 됨으로서 국가도 함부로 못하고, 큰 교회가 됨으로서 세상 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교회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게 하셨을 때 흉년 속에서 교회만 무사하게 하셨다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천하가 재난에 시달릴 때 교회만은 무사하고 모든 재난이 피해갈 때 세상은 그런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닌가?'라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천하가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에 있는 교회나 유대에 있는 교회들 모두 흉년에 시달립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의 능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모습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흉년 속에서 안디옥의 제자들과 유대의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흉년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교회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능력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능력은 자기의 상황과 형편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잘되게 해주실 것임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고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회의 능력인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일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를 평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2절의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서 죽고 베드로는 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8-10절의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 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가도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똑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똑같이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고 있는데 한 사람은 잡혀 죽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잡혔다가도 천사로 인해서 살려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물론 여러분은 야고보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닌 제 삼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예 무관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곧 여러분의 상황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고 똑같이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데도 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되고 우환만 발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이 잘돼서 부자가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그럴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신자에게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항상 육신의 좋은 쪽으로 가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 이상 아무리 하나님의 인도라고는 하지만 누구는 편하게 하고 누구는 힘들게 하시는 일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일관성이 없이 여겨지고 불공평하다 여겨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다시금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을 보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와 요새라고 말합니다. 아마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러한 하나님을 얼마든지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의 경우는 과연 어떠하다고 생각합니까? 야고보에게도 하나님은 피난처요 요새가 되시는 분일까요?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를 놓고 비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보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살려내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껏 사람을 의존해서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재능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든 베드로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그리스도의 백성일 뿐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죽었다는 것과 살았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보다 살았다는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복으로 생각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더 낫다'는 말도 있듯이 세상은 죽는 것을 불행으로 산 것을 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한 야고보보다는 구출된 베드로가 더 낫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무엇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냐?'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나에게 유익이 되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보다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뀌어지지 않고서는 우리는 신자로서의 바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즉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쪽으로 생각되어질 때 죽는 것과 산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생각에 머물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에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와 베드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다는 것은 곧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신자에게는 결코 세상의 삶을 마친다는 것이 악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즉 신자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못할 이유가 없고, 산다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나를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차별대우하신 것이 아니며 베드로가 더 나은 사람이기에 큰 일꾼으로 쓰시려고 옥에서 구출하신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살리신 것은 베드로 개인을 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서 베드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어떤 일에서도 교회 됨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로 만드시기 위해서 야고보는 죽이시고 베드로는 살리신 것입니다. 즉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어떤 일에서도 두려워 말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린 이 구절을 보면서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구해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베드로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당시 교회는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까지 옥에 잡히자 많은 염려를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염려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야고보를 죽게 하고 베드로를 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살리심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야고보와 베드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야고보처럼 쓰여질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베드로처럼 쓰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쓰여질 때 그것으로 서로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살리신 것은 그가 야고보보다 신앙이 더 좋고 잘나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더 사랑하신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 이런 것으로 사랑을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교회를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악입니다. 사단의 미혹인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아도 주를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가난해도 주를 위해서 부해도 주를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야고보로, 때로는 베드로로 쓰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돈 없다고 해서 징징 짜고 낙심하고 '헌금해라'고 소리친다면 그것은 돈으로 사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것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된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야고보 같은 신자가 있게 하시고, 베드로 같은 신자가 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배우십시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것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