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 12:6-11 하나님의 인도

지난 시간에는 헤롯에게 붙들려서 죽임을 당한 야고보와 옥에 갇혔다가 천사에 의해서 구출된 베드로를 비교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왜 다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사도인 야고보는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살리시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이것을 마치 하나님이 차별대우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이러한 일은 수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못되었는데 다른 사람은 잘되는 경우가 수없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야고보는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살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야고보는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살리신 것입니다. 그 필요란 바로 교회를 위해서였습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게 하실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옥에서 구출된 기적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야고보처럼 죽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풍랑 속에서 주무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 베드로는 어떤 환경에서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죽는 것조차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급한 상황에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를 대하면서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참된 믿음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허둥대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면서 쉽게 원망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세상일에 대한 모든 불안감을 물리치고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을 말하나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붙들려서 죽을지도 모르는 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한 기도에 부지런했던 우리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긴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기도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잘못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출하신 것은 분명 베드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 한 사람 잘되게 하시려고 천사를 파견해서 살려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 한 개인을 위해 하신 일이라면 순교한 야고보는 차별대우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한 삶이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모든 문제 역시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 이상 누구든 베드로를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서 그 약속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형통함과 개인의 행복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일이 신자인 나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버립니다. 인생의 의미를 주님의 일을 하는데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를 키워가고, 개인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데 두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신자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신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 자리까지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면 그것은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셨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삶에 몰두한다면 그것이 곧 게으름이고 나태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일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자기 개인의 일이 더 소중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이 곧 주님이 기도할 때 잠들어 있었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천사에 의해 구출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다만 환상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9절의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는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천사가 자신을 쳐서 깨우고 옥에서 나오게 하는 모든 일들이 마치 꿈을 꾸고 있고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에 이끌려서 옥에서 나오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적적인 구출을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리에 나와서 천사가 떠났을 때 비로소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자신을 구출하신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에 의해서 구출을 받으면서 '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나를 구출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천하의 주인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출되면서 자신이 구출되고 있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다만 환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자신이 구출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켜주심이라는 것을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볼 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막연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인도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는 기대감만을 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인도해주실 것만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금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고 지키고 계심을 믿고는 싶지만 내 마음 깊숙이 현실로 자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으로 살아오게 된 인생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제야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천사를 보내서 나를 지키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뜻과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신 대로 모든 일을 이루시고 이끌어 오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이 앞으로의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자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계획대로 생각대로 되어진 것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이 작정하고 계획을 세워서 되어진 것입니까? 모두가 다 살아오면서 만나게 되어지고 결혼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남편을 만났고 아내를 만났는데 그러면서도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만 지금의 자리에서 되돌아보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생각하게 될 뿐입니다. 되돌아 볼 때 그제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고생이고 고통이고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같아서 원망만 있었는데, 걸어와서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 그렇구나'라는 생각으로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생각이 앞으로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식을 키우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조차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했으니까 당연하게 주어지는 순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나약함은 신앙의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없고 다만 살고자 하는 것만 있습니다. 부디 삶에서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