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 12:12-17 떠나는 베드로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교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뿐이지 선물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함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선물을 줬는데 받고 보니 귀하지도 않고 아주 흔한 것이고 값싼 것일 때 '애걔 이런 것을 선물이라고 주나'라고 하면서 한쪽으로 팽개쳐 놓는 그런 마음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으면 감사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별 것 아닌 것에 선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놨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세상에서 우리들의 힘으로는 얻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는 것들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살아있기 때문에 믿음이 귀한 선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붙들어 놓는 능력이 되는 믿음의 본질과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삶에 대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이란 것은 믿음이라는 껍데기만 둘러쓰고 있었을 뿐 알맹이는 전혀 없는 헛된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서 옥에서 구출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야고보는 죽게 하셨으면서 베드로는 살려내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애당초 피조물은 창조주의 필요에 의해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믿음은 피조물된 우리의 존재를 보게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필요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삶이 되지 못하고 항상 나의 필요를 따라 살려고 하고 하나님에게도 나의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들이 곧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믿음이었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다만 믿음을 위장한 가짜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는 자는 착각 속에 살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인 참된 믿음이 주어진 신자만이 착각에서 깨어나서 옳은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본문의 내용에서 또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출된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으로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찾아가자 사람들은 매우 놀랍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렸을 때 로데라고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너무 기뻐서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알리자 '네가 미쳤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그들은 베드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내용을 두고 베드로의 음성만 듣고도 베드로가 살아왔음을 믿은 계집 아이와 그러한 계집 아이를 미쳤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믿음의 차이를 말하기도 합니다. 즉 계집아이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믿었고,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응답될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만 사실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그대로 응답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냇가 앞에 서서 홍해처럼 이 냇가가 갈라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고 할 때 그대로 될 것을 믿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복권을 사고 당첨을 위해 기도할 때 그대로 될 것을 믿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기도는 아예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겠지만 의심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런 예를 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본문의 내용에서 계집아이와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믿음의 차이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이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는지 아니면 옥에 있는 베드로가 헤롯에 의해 죽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본문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행동입니다.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고 말합니다. 이후에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는 15:7절에서 등장하여 잠깐 설교한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으니 더욱 더 두려움이 없이 헤롯에게 대항하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옥에서도 구출되는 마당에 겁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한 일을 말하고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 잠잠하다가 15:7절에 잠깐 등장하고는 사도행전에서 아예 그 행적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놀라운 기적까지 체험한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 같으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척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높이고자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무슨 큰 일을 해야내 하고,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힘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위대함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을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지는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행동되어지도록 지음받은 인간이 자신의 유익이 있는 곳으로만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이 자신에게 유익함을 제공하지 않을 때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복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복 때문에 행동하는 척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인간으로 고쳐가는 능력이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구출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야고보를 죽게 하시고 베드로를 구출하신 일을 통해서 야고보의 죽음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구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야고보도 구출할 수 있었지만 죽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신 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한 사람을 높이고 베드로가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전하고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전할 것을 말한 뒤에 그 자리에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얘기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은 한 개인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누가 어떤 기적을 체험했건 또한 기적을 베풀었건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힘들게 하고 고통만 안겨주는 하나님이 뭐 그리 반갑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먼저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잘살게 해줘야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되어진 일로 보게 합니다. 그것이 기적이든 고통이든, 혹은 죽음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떤 일을 가지고도 자신을 높이는 쪽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만 전해지기를 원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뒤로 사라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하지 마시고 더 깊이 알기를 소원하고 힘쓰십시오. 고통과 어려움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시고, 평안하면 평안함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의 지금의 형편을 더 나아지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지금 그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때문임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자신을 하나님의 뒤로 감추어 버리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전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