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2 마귀의 악행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란 존재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기 쉽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간혹 가다 한번씩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훨씬 낫겠는데 아예 평생토록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으로 존재하시니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육신의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영의 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이 눈이 있는 자가 진정으로 눈뜬 자이며 이를 곧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라고 해서 무슨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의 눈이란 성령이 함께한 마음의 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함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하나님의 실체를 보기를 원하지만, 영의 눈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증거들을 보게 됩니다. 가령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시는 흔적을 보는 이것이 영의 눈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섬김과 희생으로 살고자 힘쓴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시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곧 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이러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가 부흥되고 개인의 삶의 윤택해지고 자식이 잘되는 세상 것에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사단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듯 사단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사단도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신자가 사단이라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사단이 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인식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단과 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바울되기 이전)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살라미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온 말씀을 전하고 바보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게 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박수인 바예수는 총독인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예수는 총독 밑에서 일한 자였으며 그가 하는 일은 종교와 연관된 것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총독이 바나바와 사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을 때 박수가 총독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 자신의 지위에 위태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위치도 보장받을 수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박수를 향해서 사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과연 사울은 박수에 대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단지 박수가 무당짓거리를 한다는 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무당 일을 안하고 부처를 섬기지 않고 제사 드리지 않고 교회를 다니면 다 옳은 것입니까?

사울은 박수를 궤계와 악행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무당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울이 박수에 대해 뭘 그리 잘 알겠습니까? 전에부터 박수를 잘 알던 것도 아닌데 박수가 어떻게 행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지도 않았을 것인데 궤계와 악행이 가득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악행이 가득하다고 말하려면 그 사람의 행실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아니고 다만 박수이기 때문에 악행이 가득할 것이라고 추측해서 하는 말이라면 이것은 분명 바울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단지 박수라는 것 때문에 궤계와 악행이 가득하다, 마귀의 자식이다, 의의 원수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수는 사울이 총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것을 믿지 못하게 힘썼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두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힘쓰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것이고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귀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혹 교회를 나가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형편이나 상황을 마귀의 장난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곧 마귀의 술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힘씁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믿음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가장 방해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은 자기 소유로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하나님이라는 신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방해하는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그것을 마귀의 궤계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혀 문제시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마귀에게 소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하나님편에서 세상을 본다면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이고, 마귀에게 속한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환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만 있는 사람은 세상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의 것만 보일 뿐입니다.

하와에서 접근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마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의 목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유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궤계며 악행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이 더 좋게 여기도록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보다 돈이 더 좋아 보입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것보다 성공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까? 그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생각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힘쓰는 마귀의 궤계며 악행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나약함으로 발생하는 실수와 허물에 대해 정당하게 여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으로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그냥 넘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이 보이거든 역시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자임을 깨달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기를 힘쓰십시오.

신자는 마귀와 싸우는 자입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으로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할 자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도 같습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마귀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라고 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관심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역시 관심 밖입니다. 오직 자신을 좋게 해주는 것만을 찾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방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죽음을 앞에 두고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고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하고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그리스도는 없어서는 안되는 분임을 깊이 인식할 때, 그래서 세상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의미있는 것임을 인식할 때 그것이 곧 마귀에 대해 승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현실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현실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믿어야 한다고 자신을 독려하고 힘쓰는 것은 이미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자신을 독려하고 힘쓰기보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자연스런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주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자연스런 생활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믿음은 결코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저 생활일 뿐입니다. 그럴때 여러분은 승리하며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