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1:15-26 유다와 맛디아

사도행전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얘기도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성령에 대해서 교회가 많은 오해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즉 신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힘을 받고 능력을 받는 것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할 때 마음에 무슨 감동이 오고 또는 힘이 생기고 의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성령이 오신 흔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성령이 우리들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주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가룟 유다로 인해서 결원이 된 제자의 자리에 맛디아를 보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맛디아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무슨 시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열 두 명을 채워야 한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제자의 수는 항상 열 둘을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기도 하셨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굳이 맛디아를 집어넣어서 열 둘을 채우는 것입니까?

이처럼 본문의 맛디아를 뽑아서 사도의 수를 열 둘로 채우는 것은, 맛디아를 뽑았다는 것보다는 성령이 오신 것에 연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맛디아는 실패한 가룟 유다의 자리에 보충된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룟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열두 제자 전부의 실패라는 사실입니다. 열한 사도는 실패하지 않았는데 유다는 실패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다 한 사람의 실패로 본다면 실패한 유다는 없다 할지라도 실패하지 아니한 실력 있는 나머지 열 한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실패한 유다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축구 시합을 할 때 실력이 없는 사람이 끼어 들어 있다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빼버리고 실력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경기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사람의 실패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믿음을 보충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시고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끼리는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은 제자들끼리는 안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시면서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예수의 증인되기 위해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모른 사람이라면 아마 '우리가 나가서 증인이 될 수 있는데 왜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 생각에는 자기 힘으로도 능히 증인으로 살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 힘으로는 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실패한 가룟 유다를 보고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의 수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룟 유다의 실패는 그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의 실패를 나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인다면, 우린 과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들 실력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다의 실패를 보면서, 성령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6-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일어서서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유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20절의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시편에 있는 다윗의 말을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서 가룟 유다에 대해 미리 예언한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차 자신들에게 오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유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면, 결국 성령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자리에 다른 한 사람을 세워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대신 들어간 맛디아는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자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할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유다가 실패한 직무에 대해서 유다 대신 그 직무를 이루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직무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비어있는 한 자리를 굳이 채우고자 한 것은 한 자리가 비어 있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후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들의 직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맛디아를 세워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유다의 실패는 유다 한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실패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가 세워졌습니다. 이 역시 바로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유다가 아닌 맛디아로 살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신 이유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교회에 사람을 채워 넣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미 있던 직분자가 죽거나 다른 교회로 감으로서 비게 된 자리를 채우는 것을 맛디아를 뽑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또는 무슨 장로 투표나 집사 투표하는 것은 본문의 비어있는 자리를 뽑기 위해서 투표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교회에 직분자를 뽑아 세우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은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대신 세워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데 중요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자신에게서 유다와 맛디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옛사람은 주님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의 본성이며, 새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되고 고침 받은 새로운 성품입니다. 이 성품으로 인해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세워서 유다의 직무를 대신하게 하고, 그 직무란 그리스도의 부활한 증거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은, 오늘 성령이 오셔서 새사람된 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과연 무슨 직무를 위해서 세움받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룟 유다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오심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 오심 앞에서 감히 우리의 능력을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을 위해서 세움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떤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우릴 뽑았느냐는 것입니다.

24-26절에 보면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맛디아를 뽑은 것은 유다 대신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제 곳이란 주님이 가게 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길을 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멸망이었음을 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다처럼 제 곳으로 가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를 택하셔서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로 세우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제 곳으로 갈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게 하시는 곳으로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제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갈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제 곳으로 간 것은 예전의 일로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 현재의 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이 오심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을 입고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의 직무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직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직책이나 위치는 바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주어진 도구들입니다. 목사는 직책일 뿐 직무가 아닙니다. 장로 역시 직책일 뿐 직무가 아닙니다. 목사의 직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직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전부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으로 다되었는데 달리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셔서 뽑으신 것은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고치셔서 실패한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여러분에게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직무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맡기신 직무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