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13-41 바울의 설교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설교의 내용을 하나하나 생각하기는 무리인 것 같아서 바울의 설교 전체를 두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 중심 내용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고 그분이 곧 구주로 오신 메시야였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7장에서 살펴봤던 스데반의 설교도 그 중심 내용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스데반이나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한 중심은 같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볼 것 같으면 베드로의 설교 역시 스데반과 사도 바울의 설교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고 그분은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해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설교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 역시 동일합니다.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할 때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도개인들이 설교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고,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바울을 청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비방하고 변박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설교라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항상 다른 반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가지는 기대라면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설교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변화되고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설교에 이런 기대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마음을 보면 순수하게 성도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설교에 대한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망일 수도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떻게 설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은혜를 받게 할 수 있을까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되면 저렇게 해보고 싶어하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목사의 설교를 연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명목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유익된 결과를 기대하는 욕심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다른 유대인들보다 앞장 서서 스데반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데반의 설교가 사도 바울이나 다른 유대인들에게 그 어떤 효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설교와 사도 바울의 설교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설교를 보면 스데반은 모세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사사를 세우시고 다윗을 세우시고 요한을 세우시고 예수님을 세우셨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유대인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설교의 중심인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스데반의 설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한 설교로는 맞지 않다는 것이 스데반이 당한 일로서 그 결과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설교와 같은 맥락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설교였다면, 바울은 그러한 인기 없는 설교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설교로서 누군가를 믿게 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설교의 내용이 사람을 믿게 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게 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설교란 다만 하나님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보면서 설교의 능력의 여부를 따진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란 예수님을 전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설교에 호응을 하는가?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가?’ ‘오직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전달하고자 하는가?’로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42절에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울을 비방합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반응을 제각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설교 자체에 능력이 있거나 설교를 하는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면,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 모두에게서 동일한 반응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각기 상반된 반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볼 때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간섭인 것이지 결코 설교하는 사람의 재주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설교는 설교자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고침 받는 것도 설교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침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뿐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할 때도 잊지 말아야 할 자세입니다. 설교를 할 때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는 것처럼,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바를 듣고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램은 결국 실망과 허탈함으로 열매 맺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습니까? 백이면 백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오히려 조소를 보낼 때 자신의 복음 전함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경우는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말로써 변화시키고자 한 헛된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절대로 사람의 말에 의해 고쳐지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내 입만 아프다’는 판단을 가지고 상대방을 업신여길 수는 없습니다. 믿든지 안믿든지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정도하면 믿겠지라는 기대가 아니라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다만 전하고 증거할 일만 맡았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적과도 같은 특이한 사건을 체험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정도로 어리석는가하면 그러한 계기를 가지고도 경쟁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사건을 체험하고 믿게 된 사람이 평범한 가운데서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특이한 사건도 그 사건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우리는 믿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고치시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필요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심으로써 되어진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누군가를 믿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말재주도, 성격도, 인품도 사람을 믿게 할 능력은 아닙니다. 인품이 좋고 성격이 좋다면 다면 인간관계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뿐이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이 복음을 전하는데 효과적이라면 하나님은 사도나 모든 믿는 자들을 성격 좋은 인격자로 만들었어야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도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뜻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그 어떤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만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