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2-52 복음의 권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을 비방하였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로 모이는 것을 보고 바울이 자신들보다 더 인기가 있고 높임 받는 것에 시기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취한 바울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기에 오늘은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 혹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을 비방하고 욕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너는 지옥가고 싸다’라고 한마디 쏘아 붙이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어떤 욕을 해도 참고 웃는 얼굴로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돌아서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이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번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이라고 계속 가서 복음을 전해서 믿도록 하는 것이 먼저 믿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나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게 하고, 나의 인격에 변화를 받아 교회에 대해 호감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동일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의도가 충분히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게 하는 능력은 복음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복음에다가 자신의 인격을 보태서 교회에 호감을 느끼게 하려는 이것은 결코 전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를 복음을 파는 외판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즉 전도하는 것을 복음을 파는 것으로 비유하고, 찾아다니며 팔기 때문에 외판원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복음은 파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쓰고 노력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드러내기를 요구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할 일은 누군가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포하기 위해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판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물건을 팔 때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물건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끌 수 있도록 물건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자신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친절함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과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이런 수준이겠습니까?

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50-51절에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믿게 할까?’라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친한 관계가 되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그것으로 그들을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의 권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음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권위는 복음이 사람을 택하고 부르는 것이지 사람이 복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은 나를 택해 달라고 기다리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내 백성인가를 찾아다니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믿어 달라고 사정할 이유가 없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거부가 될만한 말을 빼버린다거나 말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은 다른 종교와 경쟁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택한 자를 찾는 것이지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면 많이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를 믿는 사람이 많든 유교인들이 많든 복음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만 택한 백성에게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택한 백성이 비록 100명, 10명, 단 한명이라고 해도 택한 자를 찾았을 때 그것으로 복음은 충족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전도의 의미도 기존의 생각과는 달리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될 수록 많이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믿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많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찾으시는 것에 있고, 우리의 힘으로 믿게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다만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멸망의 자식임을 자처하는 모습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지 많은 사람을 믿게 하라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전할 뿐 믿고 안믿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안믿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책임인 것이지 내가 말을 좀 더 잘하거나 설득력 있게 하지 못해서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깨닫고 이해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할 때 믿을만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부터 복음의 권위 아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나를 찾았고 복음의 능력에 의해 믿게 되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복음이 능력으로 나를 믿게 만들었다’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권위 아래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복음이 복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택한 자의 범주 안에 드는 사람들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복안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어 달라고 사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다’라고 선포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의 권위가 무엇인가를 아시고 이 권위 아래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