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9-52 선동

신자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보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 문제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자연히 내가 원하고 내게 유익이 되고 나를 지키기 위한 삶에서는 점차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신자가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란 머리로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리가 예수님 자체를 의미한다면 분명 진리는 이론도 아니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님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성경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안다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곧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고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믿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면 그는 곧 진리를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는 진리는 이미 진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머리에 쌓여 있는 이론과 지식이 곧 진리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나의 몸을 그리스도께 바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즉 내 몸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항상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과 열심에서 진리가 증거되어지는 것이고 뭇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증거되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내 생각과 감정에 의한 못된 행동들이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행동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데 큰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오히려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방해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러한 점을 볼 수 있는데,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하신 바를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복음 전하는 자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처음부터 반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을 반대한 세력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방해하고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전혀 점검하지 않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되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제사 드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율법대로 한다는 몇 가지의 행위들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지 않으니 자기 행위와 삶에 대해 평가할 기회도 가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믿는다고는 하나 그들의 삶과 행위는 이방인과 똑같은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기 위해 누구를 끌어 들입니까? 성내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합니다. 경건한 귀부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성내에서 귀족 계급의 부인들이면서 하나님을 공경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자들은 성내의 지도층 인사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성내에서 꽤 영향을 끼치는 유대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뿐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지 자신들을 추종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내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로 몰려가자 그것을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더 인기가 있어지는 것같은 것에 대한 시기입니다.

성내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44절에 보면 온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시기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로 인해서 성내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공경하게 된다면 오히려 기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귀부인과 유력한 사람을 선동해서 사도를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모인다면 내 교회 네 교회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내 교회를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분명 경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가 어느 교회에서 어떤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든 상관없이 그가 복음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라면 기뻐해주는 것이 진심으로 복음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에게는 다른 목사에게 가서 배우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에 대해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결국 내 교회와 자기 자신을 지키고 굳게 하기 위해서 다른 교회나 누군가를 험담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내 교회의 사람들은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시는 것인가?’라는 물음만 하면 금방 자신의 잘못됨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한 물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살아가는 것이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말씀에 빗대어서 점검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지 않기 때문에 뭐가 잘못되었는지, 어떤 점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전혀 발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서 자신이 그러한 자로 산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 목사의 설교가 자신의 삶과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보는 기회로 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처리해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에도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채 다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지 인생의 한부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본문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방해하기 위해 귀부인과 유력한 자들을 선동합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목사가 내 마음에 안들고 다른 누군가가 마음에 안들 때 사람들을 선동하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동이라는 것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상 계속 이어져 오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악한 행위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모여 얘기할 때 누군가에 대해 험담하는 것이 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안든 사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악한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까지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일에 분별이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두고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 점검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신자로 살아간다면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고쳐가고 다듬어 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움을 받은 것이지 복음을 방해하는 자로 세움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악한 옛사람의 본성이 항상 우리를 복음을 방해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옳은 것입니까?’ 물으며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