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 신자의 힘

흔히 목사를 가리켜서 말씀을 맡은 자라고 말합니다. 아마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목사를 그렇게 말하는가 봅니다. 목사가 말씀을 맡은 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목사만 말씀을 맡은 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틀린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맡은 말씀을 전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것이 목사에게만 해당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설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 왜 신자 모두에게 해당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는 다만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이해하고 전해야 할 말씀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의 편리를 따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 세상에 세우신 것 자체가 말씀을 맡기시고 그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자의 가치가 상실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너무 소홀히 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나는 예수를 바르게 믿고 있다’고 인정되면 그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으로 여겨버릴 뿐이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며 나를 신자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안두며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일에 있어서 너무 쉽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본성을 드러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나의 이런 모습으로 인해서 복음이 방해를 받고 말씀을 가리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주지 않기 위해 행동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행동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은 쉽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도 쉽게 그 방향으로 돌이키고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이며, 때로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기도 하는 일이며, 개인적으로도 손해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냐 나 자신이냐?’라는 갈림길에서 갈등을 하기도 하고 결국 말씀에 대한 길은 무너지고 나를 위하는 길로 가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의 말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성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핍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핍박과 배척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배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51절에 보면 유대인들로 인해서 핍박을 받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2절의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이라는 말씀과 5절의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반대파에 의하여 무척이나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누구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바고 핍박을 받는다면 힘들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배척을 받고 핍박을 받게된 원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그만 포기하고 버리는 행동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편안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지 고생되고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일을 굳이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반대와 핍박도 불사하겠지만 사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이익과 연관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에 부딪힐 때 일부로 부딪히기 보다는 타협할 수 있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는 곳마다 반대와 배척을 받는 바울과 바나바는 타협과 함께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라고 말합니다. 반대와 핍박이 있을 때 그들이 취한 행동은 더욱 그들과 오래 있으면서 복음을 담대히 말한 것입니다. 즉 양보와 타협이 없이 말씀을 맡은 자로서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고 배척하는 세력이 있으면 힘을 잃고 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들은 오히려 담대히 할 바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들은 주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전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떤 환경에도, 분위기에도, 조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바울과 바나바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개인적인 위대함을 증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분명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는다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지금껏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렵고 반대가 있을 때 쉽게 포기하고 타협하는 나약함을 보여줬다면 그것은 분명 주님의 힘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를 힘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주를 힘입어 살아가십니까? 주를 힘입는 것은 주가 살아계셔서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를 힘입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고생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주님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해면 당한만큼 내가 손해라는 생각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음 전하는 자를 핍박을 할 때 주님이 천사를 보내서 핍박자를 징벌하신다거나 조치를 취하신다면 아마 누구든 힘있게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기만 하면 주님이 너희를 가만히 안두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으니 담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핍박을 받고 배척을 받아도 주님이 달려와서 핍박하는 자를 징벌하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하면 당한만큼 내가 손해라는 생각만 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과 양보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기 백성이 애매한 고난을 받고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데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왜 쫓아가서 혼을 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주가 살아계신다는 것을 만인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예수님이 살아계시긴 하는건가?’라는 의심까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억울하게 당해도 가만히 계시는 것, 이것도 역시 주님이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꼭 우리를 구출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주님을 힘입어 살아가는 믿음은 주님 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시는데도 변함없이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내가 힘들 때 도와주시고, 내가 억울하게 핍박을 받을 때 나를 지켜주시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은 어떤 고난과 핍박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지키시는 것이지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나 자신을 지키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핍박과 어려움으로 길로 나아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힘입어 사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만큼 힘이 되는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이 시키신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시킨 대로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까지 주님이 시키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나타내라고 시키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에 신자의 담대함과 힘이 있습니다. 이 힘으로 어디서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