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1 율법과 복음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상식 중의 상식으로 되어 있으며 변할 수도 바뀌어 질 수도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서 그러한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중 과연 누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대해 반대를 하거나 지금까지 몰랐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냥 건너뛰어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성경에 있는 이야기니까 다 아는 얘기지만 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껏 몇 번이고 강조한 얘기를 다시 또 하자면 ‘다 아는 얘기다’라는 것이 사단이 여러분에게 만들어 놓은 함정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 안다’는 것이 진리에 대한 깊은 내용을 잃어버리게 하는 위험 요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얘기하면 몰랐던 내용을 듣게 되는 것은 있겠지만 진리를 말하면 분명 여러분에게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과 진리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 내용과 그 해석에 대해서는 생소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얘기하면 결국 누구나 다 아는 얘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는 얘기를 또 하고 듣는 것은 결국 복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습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 자신이 성령이 깨닫게 하신 진리에 서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기 위해 신자는 진리를 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진리이고 또 그 진리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믿음이란 오직 하나만을 붙드는 것을 의미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산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럿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데 그 중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을 의지하고 믿는 것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오직 단 한분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믿음은 구원에 대해서도 역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체험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믿음에 거하는지 머리로는 알고 이해하는 진리를 거듭 들으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거나 바르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사실 믿음 생활이 오래 될수록 타성에 젖을 수가 있고 자신이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의지하고 믿는 쪽으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오래 교회를 다니며 많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예수만으로’라는 진리가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인간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란 은혜의 열매로써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임은 분명한데 문제는 행위가 없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율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 중에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율법에 대한 다른 이해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율법이 진리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으로 인해서 진리가 굳게 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율법에 대해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에 대한 율법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아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고 모든 마음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비록 ‘하라’ ‘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연약한 자이며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본문도 보면 그러한 문제로 논란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와서 형제들을 가르쳤는데 그 내용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말하는 자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지 말고 할례를 믿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를 믿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인간쪽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곧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할례를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는 행위들을 기준해서 믿음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시작해서 행위, 즉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믿지 말고 자랑치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잘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구원에 안심을 하려고 합니다. 행위가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서도 소위 주일을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여러 모습들을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 삼으려고 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거하지 못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진리를 잘안다고 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오직 예수님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역시 예수님만으로 다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만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뭔가를 행함으로서 더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이해하기가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7-11절까지의 베드로의 변론을 보십시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한 말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범하지만 복음의 중심을 말한 것입니다. 고상하고 수준 높은 말로 치장한 신학을 얘기해야 복음이 복음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말한다면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절대로 인간의 행위로 증거 되어지지 않습니다. 복음, 즉 진리는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평안을 가질 때 그것이 곧 예수 안에 있고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역시 복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의 요구로 포함된 것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로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도 능히 이루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요구하다는 것은 자신도 메지 못하면서 남에게 메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충분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위해 보태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위가 없어도 되는가?’라는 반발은 끝까지 행위를 버리지 못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행위는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 내는 자연스런 열매일 뿐입니다. 그 열매는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써 나무를 아는 기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됨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할례를 행한 자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은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자신은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거하는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했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무엇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어떤 장소나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하기보다는 항상 여러분의 신앙이 진리에 거하는가를 확인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