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21 이웃 사랑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것을 그토록 주장하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이 말하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믿음을 말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이 비록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해도 율법에서예수님으로 돌아서기란 참으로 힘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참된 믿음인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흘러오던 자기들의 전통과 습성, 그리고 자신들이 듣고 배운 지식들을 옳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틀린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보게 합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신자 되어진 것이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만으로’라는 말 자체가 기분 나쁜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이 마치 율법을 버리는 말로 들려지기 때문이고,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 없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이 충돌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먼저 20절에 보면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라는 말씀을 사도들이 신약에서 새롭게 세운 율법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와 같은 것은 안해도 되지만 위의 세 가지 규례는 계속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사도들이 강조하는 것은 19절의 말씀대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멍에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유대인과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지만 이방인들이 알게 된 믿음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을 얻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방인들에게 또 다른 규례를 율법화해서 요구하는 것은 복음을 말하는 사도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신앙의 뿌리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행위를 기초로 해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위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데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닌 율법으로, 인간의 행위로 돌아가도록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이 곧 복음이 아니며 복음이 곧 율법이 아닙니다. 즉 믿음은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행위가 곧 믿음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행위를 요구하고 강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멍에를 씌우는 유대인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 사도는 20절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까? 야고보서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말이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이라면 결국 야고보 사도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20절의 의견을 통해서 확인 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3가지 규례(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 하는 것은 피 채 먹지 말라는 것과 연관이 있으므로 피를 멀리 하라는 것과 하나로 봄)는 십계명을 세 가지로 줄여서 제시한 것도 아니고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에 대해 율법은 전혀 조건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마음을 깨끗케 하셨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고서 세 가지 규례가 나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 가지 규례는 율법을 축소해서 말한 것도 아니고 구원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세 가지 규례를 또 다른 율법적인 의미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규례는 물론이지만 목메어 죽인 짐승은 먹지 않아야 한다고 하고, 피 역시 먹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피가 들어있는 선짓국이나 순대와 같은 음식은 먹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쨌든 세 가지 규례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 복음만으로 구원 얻음을 말하던 사도가 왜 세 가지 규례를 말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규례는 유대인에게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신자에게 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에게 이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한 형제된 관계가 서로의 전통과 살아온 습관과 성경에 대한 이해의 다름으로 인해서 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도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교회란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는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줘야 할 관계로 모이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분명 사도가 말한 세 가지 규례를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유대인과 하나 되는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같이 예수님을 말하고 믿으면서도 전통적인 문제, 성경에 대한 이해 문제로 인해서 하나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규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이 세 가지입니까? 그것은 당시 이방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것을 금함으로써 유대인들을 배려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우상 제물에 대한 관념이 없습니다. 때문에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우상 제물을 가린 유대인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시 이방 사회에서 여자는 천대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래서 음행이 널리 성행했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음행하는 것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먹는 것 역시 피는 생명이니 먹지 말라는 규례를 엄하지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규례들을 이방인들이 지켜줌으로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배려주고 그런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누가 옳으냐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으로 나아가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는 거리낌이 없는 행위이지만 상대방은 중요하게 보는 것이라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가리켜서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진심으로 알고 이해한 사람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행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신앙이니까 당신은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은 극히 이기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법을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해서도 안되고 내 자유를 가지고 남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며 복음과 율법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