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0-41 사도의 다툼

사도행전은 다른 성경과는 달리 사도들이 실제 복음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특이한 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이 단지 인간의 다툼에 대한 문제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지만 문제는 우리가 신앙적인 면에서는 높이 보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고 갈라섰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도 사람이니까 서로 의견이 달라서 다툴 수가 있지 않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다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사도의 다툼에 대해서 전혀 어떤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이 잘못된 것이라든지 아니면 옳은 것이라든지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하면 혹여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예로 들어서 교회에서 서로 의견 충돌로 다툼이 일어나고 갈라서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복음을 전파하는 문제로 다투고 갈라섰다 그러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다툼이 있을 수도 있고 갈라설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문은 중요한 내용이며 또한 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섬으로서 오히려 복음을 더 많이 전할 수가 있었으니 유익이라고 하면서 다투고 갈라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본문의 다툼에 대한 바른 이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그동안 주의 말씀을 전했던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살피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자고 말합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가는가를 돌아보기 위해서 가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요한이 전에 자기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데려가기를 거절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서기까지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13절에 보면 바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왔을 때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요한이 바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바울이 요한을 데려 가기를 거절하는 것을 보면 뭔가 바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바나바가 부탁하는 것이고, 또 얼마든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요한을 다시 받아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바울이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서면서까지 용납하지를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서신을 기록한 바울을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바울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바울이 자신이 말한 복음의 도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서신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말에 완벽했기 때문에 서신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바울을 세워서 교회에 전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역시 자신이 쓴 서신서에 대해서는 연약한 자였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을 보면서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이 잘못이냐 아니냐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기록한 것이 ‘다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너희는 다투지 말아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도덕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투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다튼 사람들은 저마다 복음을 핑계하면서 자신의 다툼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툼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도의 다툼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도들의 다툼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의 문제이며 우리 역시도 얼마든지 다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다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봤던 말씀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규례를 말하고 삼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율법을 구원의 문제가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랑의 문제로 이해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행함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라면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다.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들은 과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까?

바울과 바나바처럼 훌륭하고 믿음이 높은 사람들이 왜 다투고 갈라서기까지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모습을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즉 믿음이 있다면 전혀 싸우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고 더군다나 갈라서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율법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생각의 차이가 원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거부한 것은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왜 돌아갔는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신앙적인 문제이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가령 복음을 전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든가 아니면 회의가 들었다든가 어떤 믿음의 문제로 인해서 바울에게서 떠난 것으로 짐작해 본다면 그러한 마가를 데리고 교회를 방문하면서 신자들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굳건하지 못한 마가를 데리고 신자들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를 생각해서 데리고 가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골 4:10). 때문에 마가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을 수 있으며, 비록 마가가 믿음이 연약해서 떠났지만 다시 함께 교회들을 돌아봄으로써 마가로 하여금 믿음에 굳게 서도록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저도 답답하지만 어쨌든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었고 그 생각이 서로 충돌되고 갈라선 결과까지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섰지만 그 둘은 여전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즉 인간적인 다툼과 갈라섬이 복음에 대한 장애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다퉜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것은 생각의 차이이며 성격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성격이 복음이 전해지는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즉 복음이 증거되는데 도움이 되는 성격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시는 일은 중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싸우고 다투고 갈라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중지되지 않음을 믿자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고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즉 율법적인 것을 믿음으로 연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개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끝까지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말이 싸움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잘못됨에서도 복음은 전혀 영향 받지 않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해야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신자가 서로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달라서 싸우고 다툴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갈라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의 상함으로 끝나버린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현장에서 이런 우리들도 구원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임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일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못나고 항상 엉망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구원을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