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6-18 귀신들린 여종

간혹 간증하는 사람 가운데,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해서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은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목사는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점이나 쳐 볼까 해서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여기 와서는 안될 사람이 왔다고 하면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열심히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간증이 노리는 것은 점쟁이도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당, 점쟁이, 이런 사람들도 알아주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로 가라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뭔가 남다른 사람이 분명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죽 엉터리고 형편이 없으면 점쟁이까지 동원해서 붙들려고 했겠는가 생각하고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신자에게 자랑거리는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지 세상이 알아주고 더군다나 점쟁이가 알아주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로 인해서 루디아란 여인이 믿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16절부터 보면 한 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옥에서 간수가 구원되는 얘기가 등장합니다.

간수가 구원되는 얘기를 살피기 전에 먼저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나가게 합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여종의 주인으로부터 성을 요란케 하고 로마 사람이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는 이유로 관원에게 끌려가 고소를 받게 되고 그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의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라는 말을 보면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좇아와서 한 말은 그들을 높이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욕하는 것도 아니었고,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말은 곧 구원을 전하는 말임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 들린 여종이 한 말은 바울과 실라를 유익되게 한 말이었겠습니까? 아니면 해가 되는 말이었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입장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귀신도 인정하고 높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실 이방인이 볼 때 용하다고 여기는 점쟁이가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저들이 말하는 것은 들을 필요가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쨌든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면 굳이 귀신을 쫓아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실라를 비난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높이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귀신을 좇아내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종을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점하는 여종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그 여종이 말하는 모든 것은 여종의 말이 아니라 귀신의 말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귀신이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돕는 말을 했겠습니까? 분명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을 훼방하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귀신이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돕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결론에서 여종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여종의 말에는 분명 귀신이 노리는 함정이 있음을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의 말에 담겨 있는 함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사단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단은 우리를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많이 쓰는 예화 중에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의 지붕에서는 사단이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발악을 하는데, 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의 지붕에서는 사단이 할 일이 없어서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로서 교인들로 하여금 열심히 기도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무작정 기도하게 할 뿐, 왜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바른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단의 바라는 대로 나아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누구든 예수를 대적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에 보면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예수님의 편으로 위장을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아는 존재로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일은 쉽게 분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국회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군대의 파병동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는 파병동의안이 통과된 후 이라크에 파견할 한국군의 편성안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편성안을 보면 공병부대와 의료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숫자가 장교와 부사관 사병을 합하여 666명이었던 것입니다. 666란 숫자가 무슨 수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짐승의 수, 악마의 수라고 해서 기독교인이라면 대다수가 꺼리는 수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666이란 숫자에 대해서는 많이 꺼린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편성안이 발표되자 당장 인터넷에서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국방부는 파견지역이 물이 부족한 지역임을 감한해서 샘을 파는 기술을 가진 사병 7명을 추가해서 673명을 파병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악마의 수를 기독교가 막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마귀적 사고방식에 부합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666을 어떤 강한 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한 힘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힘에 대해 경계를 하고 힘을 힘으로 대항하는 사고방식이 곧 마귀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666이란 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사단은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이란 이름과 명문으로 신자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참된 신앙과 반대된 것, 즉 마귀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이 한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맞는 말이지만 바울이 그 말에 합세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은 맞지만 그 내용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이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귀신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와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귀신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세상속에서 구원입니다. 세상 안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 귀신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여종에게 와서 듣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앞날에 대한 이야기고, 현재의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여종의 입에서 나온 구원이란 말의 의미가 과연 세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바울은 구원이라는 말은 맞지만 구원에 담겨 있는 그 내용은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냄으로서 그들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귀신의 말은 바울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종의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을 대단한 사람으로 높이게 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바울과 실라를 높임으로 귀신을 좇아낸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고 말합니다. 귀신은 여러 날을 말을 했고 바울은 그것으로 심히 괴로워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들을 때 귀신은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말은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을 여러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괴로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은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만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기를 소원하고 힘쓰는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사람들 앞에서 여러 날을 바울 자신을 높이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바울에게 괴로움이 된 것입니다.

귀신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을 귀신 들린 여종을 보는 차원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좇아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괴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둔 신자로서 자신을 높이는 말을 들을 때 괴로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여러분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을 높이는 말에 대해서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예수님이 다 하신일이라고 겸손히 말을 했으면서도 칭찬하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기쁨으로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높임 받고자 하고 칭찬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입니다. 사단은 여러분에게 칭찬의 말로 다가옵니다. 칭찬의 말에 기뻐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두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겉을 보지 말고 내용을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도 겉을 보지 마시고 속 내용을 들여다 보시기바랍니다. 칭찬의 말, 높여주는 말에 오히려 괴로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을 칭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않는 칭찬의 말은 그를 해롭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귀신을 좇아내는 바울처럼 스스로 높아지기를 거부하고 항상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면서 하나님만 높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높아지고자 할 때는 결국 높임 받기 위한 가장된 행동이 표출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고 이 모든 것이 사단의 유혹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