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26 기도와 찬미

성경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과거이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과거의 분으로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내용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들이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워 감으로써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들이나 형편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되어지는 순간들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나 개인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각으로는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시고 그대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생이고 고통일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은 나의 고생과 고통을 이용하여 선한 열매를 이루고자 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과 실라의 얘기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옥중에서도 기도하고 찬미하는 바울과 실라를 얘기하면서 어떤 고통에서도 기도하고 찬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신앙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힘든 일이 주어지면 다른 모습이 나와지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몸으로 깨달아 가고 배워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주어지는 고통도 신자의 신앙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도구인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는 귀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점을 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여종으로 인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던 주인이 바울과 실라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하게 되고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옥에서도 기도하고 찬미하였고 그때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면서 옥문이 열리고 매었던 착고도 풀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기도하고 찬미할 때 이런 능력만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기도하고 찬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멋있는 일이고 힘이 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잊어버리는 것은 그런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과 고통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서 편안히 지내며 기도하고 찬미했습니까? 22-23절을 보면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기는 수모를 받았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 당시의 매는 채찍을 말합니다. 수없이 채찍을 받으면서 살이 터지고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것도 원하십니까?

우리는 좋은 것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열매만 바라보면서 그 열매만 내 손에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열매란 나에게서 맺어지는 것이고, 열매가 맺어지기까지는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지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과정들은 다 생략해 버리고 좋은 열매가 내 손에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열매는 여러분에게서 맺어져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면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도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찬미라는 것은 감사의 노래이며 기쁨의 노래입니다. 따라서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는 찬미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옥에 갇힌 상황에서 힘을 내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힘을 내기 위해 찬미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찬미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친미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찾던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감사하고 기뻐서 찬미한 것으로 말입니다.

찬미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상황에서 찬미보다는 한숨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선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주어진 어떤 일들도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들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찬미입니다.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때부터 그의 삶은 절대로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를 맞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빌립보에 와서도 역시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계속해서 꼬이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환영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육신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환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결국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을 아는 그 영혼은 영원하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조그만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비명을 질러댑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을 보지 않은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결코 헛된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자 땅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매어두고 있던 착고도 풀렸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를 구해내기 위한 기적이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는 다음날 상관이 사람을 보내서 풀어 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즉 옥문이 안열려도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렸다고 해서 옥에서 도망을 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옥과 착고는 바울과 실라는 붙들고 있는 도구였습니다. 즉 인간에 의해서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풀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신자를 흔들거나 방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를 살아계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의 모습이라고 본다면 결국 세상의 그 무엇도 신자의 그러한 믿음을 방해하지도 못하고 흔들 수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능력은 어떤 일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도 나를 흔들지도 무너뜨릴 수도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데서 더욱 굳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피흘리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에게는 참으로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흔들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고 희미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밖에 안됩니다.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누구신가를 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