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34 복음의 권세

만약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인간에게 일임하신 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 같습니까? 믿음이 좋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을 잘 실천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엉망이 될 것 같습니까? 저는 엉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을 안해서 엉망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엉망이 된다고 하는 것은 실천이라는 것을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엉망이 되었다는 말 대신이 되어진 것이 없다는 말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엉망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재주도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믿음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인도하시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빌립보의 루디아를 위해서, 그리고 옥의 간수를 위해서 바울과 실라를 그곳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일은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일하신다는 믿음으로 마음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동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미를 하는데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집니다.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가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죄수가 도망을 친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죄수가 도망을 치면 간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어야 했기 때문에 죄수가 도망을 친 것으로 오해한 간수는 살 소망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옥문이 열린 것은 바울과 실라를 도망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간수에게 살 소망을 잃어버린 상황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할 때 바울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크게 소리칩니다. 그러자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뛰어 들어가서 무서워 떨며 부복하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는 물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간수가 바울을 보기 전까지는 살 소망이 없어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자 놀라며 구원에 대해 묻게 된 것입니다. 간수 스스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소망이 다른데 있음을 바울을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게 된 것입니다. 즉 간수 스스로 바울에게 구원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의 처지는 간수가 볼 때는 살 소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매를 맞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미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한 것은 살려달라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찬미라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노래인데, 만약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면 실제로 옥에서 빠져 나온 뒤에 찬미를 했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옥이든 어디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간수 역시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살소망이 끊어졌다고 여겼을 때 생각나는 것은 자결 밖에 없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살 소망이 없는 형편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수는 그러한 바울과 실라에게서 구원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묻게 된 것입니다. 즉 당신의 삶의 소망과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간수에게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바울을 보면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바울을 예수에 미친 사람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간수에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황이 그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두고 보면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는 것은 바울 개인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여러분 개인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성도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 까지도 여러분 개인의 문제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만약 모든 것이 내 개인적인 문제로 끝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행동과 삶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부터 믿음의 힘을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보여주고 나타낼 것이 전혀 없는 나약한 신자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권세가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세상을 기웃거린다면 세상은 오히려 신자의 믿음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삶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개인적인 문제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는 잘 압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 안에서 날마다 살피고 우리 스스로를 새롭게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이라는 것은 잊지 마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