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 성경과 예수

세상을 보면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곳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하는 곳은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를 일입니다. 설사 예수를 얘기한다고 해도 그 예수가 사도가 증거 했던 바로 그분이신지 아니면 사도가 증거 했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예수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살피고 스스로 판단해야 할 책임은 바로 여러분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고 해서 안심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같으면서도 교회 아닌 곳이 부지기수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보고 판단할 때는 절대로 그 교회가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기준 삼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간의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성도를 재미있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주일의 피곤한 삶을 달래주고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기 위한 오락단체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세상 일로 인해 피곤하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고 깨닫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그리스도만 말하면 너무 딱딱하지 않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는 재미없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과연 재미없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희생과 섬김이 재미없는 것입니까? 성도가 교회에 모여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증거하고 서로 나눈다면 과연 그러한 교회가 재미가 없겠습니까? 그리스도만 말하는 설교는 재미없고 딱딱하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함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은 재미없다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재미는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과 삶의 즐거움, 기쁨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3절에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성경의 뜻을 풀어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예수임을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바울이 그 뜻을 풀었다고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어느 곳의 뜻을 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그분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말씀의 뜻을 풀어서 전파해야 할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경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거짓 사도입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같습니다. 목사는 성경의 뜻을 풀어서 여러분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뜻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됩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의 뜻을 풀 때 증거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성경이 목적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만이 성경에 충실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아닌 개인의 사업과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말이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책임은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있다면, 바른 판단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혹 여러분의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를 떠나 있다면 여러분은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는 무지에 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결과가 좋으면 참이고 좋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판단하는 좋은 결과라는 것이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양적인 성장, 또는 사람들의 인정, 이런 것들을 좋은 결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옳은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세상 일이 잘되면 복 받았다고 하면서 신앙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성장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면 뭔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바울은 분명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다시 도망을 쳐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경건한 헬라인의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과연 바울과 실라의 교인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까? 도망을 치는 형편인데 내 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에게는 오직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결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하고 가르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명이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고 회피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신자 됨을 포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해서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먼저 부름 받은 책임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기회이며 도구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참으로 어려운 문제를 말씀드리고 있음을 잘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자의 삶은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삶의 자세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자신에게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주어질 때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속에 나 개인을 위한 욕심을 품고 그리스도를 찾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가 왜곡되어 나타나게 되고 교회의 참된 모습을 우리 스스로 허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를 위해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교회에서 몰아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사모하는 참된 교회에서 증거될 때 생명의 말씀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그대로 증거해 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싫어한다면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성경의 뜻을 풀어서 오직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것임을 우리 속에 굳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힘이 되고 분명한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만 고집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던 그것까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사도들을 따른 사람이 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복음만을 증거하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노라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무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날마다 성경의 말씀을 살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이 우리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한다면 성경을 살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 생각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기 때문에 날마다 말씀을 살피며 우리의 길을 점검하고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경의 예수를 미워합니다. 그 예수를 증거하고 전하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세상의 환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멀리 할 수 없는 것은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를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고 또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만 살아가십시오. 주위를 보지 마시고 남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신경 쓰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신 길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삶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세상에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