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0-15 이것이 그러한가

성경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유는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 체계에서 성경을 대하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이해를 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이해를 옳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어려운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서점을 가보면 알겠지만 성경에 대해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주석으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목사들의 설교, 성경 강해가 책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을 얘기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책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성경을 근거 삼아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모든 책들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얘기입니다. 제가 깨달은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바라볼 때 옳지 않다고 판단되어 진다는 것이다. 제가 어렵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말씀에 대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말씀에 대해 틀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맞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에게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는 말을 한다면 분명 고집과 독선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령으로 깨닫는다는 말은 맞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성령으로 깨달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령으로 깨달은 것이라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외적이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해석을 성령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단이나 사이비까지도 성령을 언급하는 실정입니다. 성령의 깨달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구분을 해주신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마치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침묵을 하고 계신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무엇이 바른 성경인가?’에 대해서는 결국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에 한 성령으로 깨달았다면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이해한 내용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무엇을 말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증거되는 예수님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바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저의 생각이 맞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말씀드리고는 있지만 ‘내 말이 맞으니까 내 말만 믿으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여러분의 몫이고 여러분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원칙을 한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대한 베뢰아 사람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내용인데, 아마 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대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말할 때 이 본문을 제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으니까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의 뜻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쫓기게 됩니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오게 된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보면 11절에서 베뢰아 사람과 데살로니가 사람으로 구분하여 말한 것은,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원주민을 일컬어 말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거하는 유대인을 일컬어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베뢰아 사람은 베뢰아에 거하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고, 데살로니가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거하는 유대인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결국 베뢰아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공부했음을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지만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각기 달랐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말을 했을 것입니다. 즉 성경을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베뢰아의 유대인들에게도 지금까지 알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바울을 붙잡으려고 쫓아 다녔습니다. 바울의 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배워왔고 또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바울이 틀렸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자신들의 관습이나 상식, 또는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바울의 말이 과연 그러한지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사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것은 편견, 또는 관습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옳다고 믿을 때 다른 말에 대해서는 아예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이 때로는 분란과 분리를 가져오기도 하고 진리를 밀쳐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말을 믿으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아는 바가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저의 해석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는 해석이라면 얼마든지 저의 생각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윤식 목사가 말하는 것이니까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속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결국 저에게 매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마음에 중심으로 굳게 서 있는 성경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 말을 옳다고 듣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혹 저에 대한 감정이 나빠질 때 가차없이 저의 말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인간관계가 바탕이 되면 나와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 내가 신뢰한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상고함으로써 옳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말이기에 신뢰가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말씀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지게 되는 위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베뢰아 유대인들의 태도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편견과 관습을 버리고 과연 그러한지 스스로 말씀을 상고하며 깊이 살피는 태도야 말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며 살피지 않는다면 분위기와 인간에게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말을 들으면 맞는 것 같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것도 맞는 것 같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목사가 바뀔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가 전혀 다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무리 없이 후임 목사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말해주는 것은 설교를 그냥 들었을 뿐, 바른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열심을 의미합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 자기들의 편견보다는 과연 그러한지 살피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사상을 지키고 고집하는 것보다는 바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께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바른 말씀을 배우고 따르기를 원하는 열심입니다. 그 열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살피고 상고하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에까지 와서 소동을 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거기에 동조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상고함으로 인해서 바울의 가르친 바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 빌립이 그에게 읽는 것을 깨달았는가 묻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는가 하면서 빌립을 청하여 말씀을 가르침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여러분 스스로 깨닫기에는 힘든 점이 많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돕기 위해 저같은 사람이 세워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말을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고, 저에게서 다만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른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가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