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6-21 사람이 즐기는 것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사도 바울을 붙잡고자 하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을 피하여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아덴은 고대 헬라의 대표적인 도시 국가로서 오늘날 아테네를 말합니다.

바울은 아덴의 온 성에 우상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시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변론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바울이 이방신을 전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말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가지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21절의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덴은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많았고 지식이 높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2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지식을 말하고 듣는 것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 대해서도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자연히 바울의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는 단지 새로운 것을 말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이 즐거움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것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덴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새로운 것은 흥미와 재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금 지나간 것은 헌 것이라고 하면서 무관심의 대상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기업은 자연히 날마다 새로운 것을 계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오늘날 기업은 누가 얼마나 빨리 새로운 것을 계발하느냐에 그 생사존망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입니다.

전자제품이나 일상품, 모두가 그 모양이나 기능들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음식까지 다양함과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붙듭니다. 김밥 하나만 해도 수십 종류가 등장하고, 라면 역시 수십 종류가 등장을 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즐기는 현대인의 특성이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도 보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제공해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새로운 것을 다양하게 제공해주는 교회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교인들이 즐겨할 수 있는 다양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교회를 선호하고 부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재미있는 것을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즐거움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만 예배드리다가 야외로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거나, 아니면 단체 관광을 가는 이런 모든 것들도 재미며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의 즐거움이 그런 것에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말씀에서 즐거움을 얻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얘기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것으로 다가옵니까? 아닐 것입니다. 교회를 다닐 때부터 들었던 얘기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여러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옛 이야기로 들려질 것입니다. 새로울 것도 없고 따라서 따분하기만 할 뿐 즐거움은 전혀 없는 것이 십자가 얘기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말씀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분명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옛날부터 들었던 내용 그대로입니다. 어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님이 오늘은 물에 빠져 죽은 분으로 바뀌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일단 ‘잘안다’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리고 잘아는 내용에서는 더 이상 새로움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얘기를 하면 벌써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합니다. 즐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말씀에는 과연 새로움이 없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죄인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죄인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말씀을 대한다면 말씀은 언제나 내게 있어서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죄인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잘다니는 교인으로 말씀을 대하고 있으니 말씀에서 새로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자만이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말씀을 들여다 볼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발견케 하는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깨달았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 얻는 새로움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에서 새로움을 얻고 즐거움을 얻는 신자는 교회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야외예배를 가서도 모처럼 야외예배라는 새로움 때문에 즐겨하는 것이 아니라, 야외에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야외에서 예배드리면서 천하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발견하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원하는 사람은 말씀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 흥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를 즐기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한다면 이러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의 새로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자체가 항상 우리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즐거움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나의 취미를 충족시킴으로써 얻는 즐거움에서 하늘의 사람으로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즐거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영원한 비참함과 멸망에 해당된 자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가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나를 부수는 도구입니다. 나를 무너뜨리고 죽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는 누구든 죽어야 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이고 다시 새롭게 살리는 것이 말씀입니다. 무너뜨리고 다시 새롭게 세우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대한다면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다가 말씀안에서 세상이 헛됨을 발견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는 새로운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이것이 즐거움이며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모른다면 그것은 말씀과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은 여러분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처한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분명 말씀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재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살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놓친다면 여러분은 헛된 시간을 낭비하는 것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인식하시고 말씀 앞에 나오십시오. 죽어야 할 자로, 영원한 사망에 처해야 할 악한 죄인으로 나오십시오. 그렇게 여겨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오고 애통함이 나오고 상한 심령이 되도록 까지 여러분의 악함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펴십시오.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분명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새로움이 여러분에게 밀려올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였음이 예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들었는데 지금은 내 가슴 깊이 밀려오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알고 말씀 가운데 거하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