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31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인간이 눈을 뜨고 세상 만물을 본다고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알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는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멋대로 추측하고 연구하고 상상해서 만들어지는 가짜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짜 하나님을 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이런 분임을 하나님 스스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해주셔야 하나님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간과해 버릴 때 우리는 우리의 헛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크나큰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울은 아덴에서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이성과 생각을 동원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신을 밝혀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동원하면 능히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신을 인간 아래 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1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식과 지혜로 출발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도는 단지 예수님을 믿을 것으로 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도란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를 전한다는 것은 도를 아는 자가 도를 모르는 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도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도를 알 수 없고 누군가로부터 전달 받아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마지막에 누가 남습니까?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서 도를 전달 받은 것을 위로 거슬러 가면 최종의 사람은 누구에게 도를 전달받은 것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결국 최초의 도의 전달자는 성령님이시며, 성령으로 인해서 도가 전달되어 확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를 왜 미련한 방법이라고 말합니까? 미련하다는 것은, 스스로 깨우칠 능력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전도는 스스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전달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이성을 동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이성과 생각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생각이 없고 이성이 없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세상의 지혜가 신을 찾기를 힘쓴다면 그것은 신에 대해 파헤치겠다는 의도일 뿐이지 신을 찾아서 경배하고 복종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지혜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를 따르지 말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바울은 두루 다니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다고 합니다. 신을 찾기를 노력한 세상이 혹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을 것을 가정하고 그러한 신에게까지 경배를 하고자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지 못하는 신까지 새긴 단이 있는 것은 혹시 자신들이 알지 못한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종교성으로 보며 아덴이 이러한 종교성이 많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을 모시기 위해 많은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만유를 지으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의 손을 지은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국 아덴 사람들처럼 인간의 이성과 지혜에서 상상해낸 잘못된 신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은 그저 예배드리기 위한 공간일 뿐, 아무리 치장을 잘한 예배당이라 해도 결국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에 불과할 뿐이며,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거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로 섬기지 않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25절에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의 기쁨을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과 섬김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과 섬김을 신 앞에 음식을 바치고 신이라 부르는 형상을 치장을 하고,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는 분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인간의 도움 필요없이 하나님 스스로 얻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으로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 역시 아덴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26-27절에 보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인류는 아담을 통해서 난 한 혈통이기에 아담이래로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년수도 하나님이 정하시고 우리의 거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신의 간섭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에게는 신에게 간섭받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을 섬겨주면 그 대가로 복을 누리는 것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8-29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신의 소생이라고 말하면서 신을 금, 은, 돌에 새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을 금, 은, 돌에 새기는 것은 그것들을 신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신의 소생이라고 할 때 결국 금과 은과 돌의 소생이라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논리릍 통해 금과 은과 돌에 신을 새기는 것이 인간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과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비교해 볼 때 어떻다고 생각되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십니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잘못되어진 것이 있을 때 언제나 수정하고 바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곧 진심으로 성경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결국 보면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성경 위에 두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든 자신의 생각이 옳으며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면 믿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식입니다. 우리가 종종 이런 오류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신자가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아무 염려 없이 편히 살면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서 알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마시고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시기를 원하십시오. 그럴 때 말씀은 여러분에게 빛으로 존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