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2:4-11 성령과 방언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되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이제 내 백성이다'는 선언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선언하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냥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됨을 자각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이 곧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나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그 마음을 생각할 수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과 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느냐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결국 자기 일, 즉 육신의 일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오심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셔서 하실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사명은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결코 신비한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생각하지 않던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즉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시각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오심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해서 오순절에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오순절을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여긴다면, 결국 우리는 주일 외에 성령이 오신 날로서 오순절을 지켜야 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서 보여졌던 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현상이 곧 방언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을 했지만,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있게 된 방언과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방언을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9-11절에 보면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외국의 말이기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언어가 아닌 신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있었던 방언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비한 말이 아니라 그냥 외국말이었습니다. 여러 외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각기 자기나라 말로 듣게 된 것입니다. 즉 한국 사람이 말을 하는데 미국 사람은 영어로 듣게 되고, 중국 사람은 중국어로 일본 사람은 일어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나라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오신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을 이세상의 말이 아닌 신비한 용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신자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내세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고 그로 인해서 제자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오신 것을 우리 멋대로 상상할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하게 된 것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아가야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방언이란 단지 신비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그 자리에 몰려 있던 모든 이방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의 통일입니다.

4절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복음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땅끝이란 신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범위는 정해져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나라까지 모두 포함된 것이 땅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 끝에 해당되는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하는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왜 오셨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방인이 듣게 되었다는 것은, 복음은 이제 유대인들의 것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인의 것으로 소유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만이 아니라 유대인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에게도 허락되었고 이방인들에게까지 허락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천하에 퍼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신자에게는 특별한 체험이나 어떤 감동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한 감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님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뭔가 하실 일이 있어서 오셨음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배우지도 않은 외국말을 하게 되더라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외국말을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증인으로 사는 삶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증인이 되어라'고 말씀하셨다면 '성령을 보낼테니까 성령을 받아서 증인의 일을 잘 해봐라'는 뜻이 되겠지만,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 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땅끝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은 이미 이방인에게까지 허락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대상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거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사람되게 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을 임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로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령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기뻐하는 신자로서 세상에 보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신자라면 자신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만 순종하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은 제자들을 세상속으로 보내셨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함께 나누라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보낸 것이지 심판자로 보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제자들과 같은 방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방언은 성령이 오셨을 때 꼭 있어야 할 증거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방언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우월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나서 알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복음을 맡겼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맡겼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전달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복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는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함께 나누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서로가 나누어야 할 관계로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깨닫게 된 복음을 나눌 자로 함께 한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대상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새롭게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엉뚱한 길에서 엉뚱한 일로 세월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받은 분들이라면 그것은 복음을 나눌 자로 부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기억하시고 이 일에 마음을 두고 힘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