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세상은 결과를 가지고 시작과 과정을 판단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시작과 과정 역시 옳은 것으로 판단하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시작과 과정 역시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봄으로써 복음에 대한 많은 부분들이 오해되어지기도 하고 잘못된 이해를 하는 경우도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모든 것을 교회의 부흥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결과가 교회의 부흥으로 맺어질 때 모든 것을 옳고 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 부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 때면 어떤 것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이고 복음이라 할지라도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바른 복음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연히 복음보다는 교회 부흥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에 마음이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모든 일을 교회 부흥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로 온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드러내는 증인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부흥을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저 역시 교회 부흥이 싫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이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될 수 있겠다’라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제가 하는 그 어떤 것도 내 욕심을 챙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될 뿐입니다. 설사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만약 어떤 일의 결과가 내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복음은 신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늘로 가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의 사명을 맡기실 때 어떤 결과를 약속하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증인으로 살 것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결과란 주 예수님의 몫입니다. 따라서 결과를 우리가 목표할 수 없는 것이고 의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과를 가지고 시작과 과정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결과를 목표하지 않고 의도하지도 않고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고, 좋은 결과를 통해서 자기 행위에 대한 가치가 높이 드러나고 평가되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을 버린 채 다만 복음만을 염두에 두고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음을 사랑하는 신자가 아니면 보여질 수 없는 귀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여러분을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 할 증인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서 진행되어지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즉 지금의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곳에 여러분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내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서든 내가 원한대로 안되었다고 해서 낙심할 일은 없다고 봅니다. 증인의 일은 다만 증거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시시하게 보인 결과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중에는 큰 열매로 맺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쟁론하며 ‘말쟁이’라는 조롱의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는 바울의 말을 듣고 믿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덴에서는 단지 새로운 교를 전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뿐이었습니다. 17:32절에서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라고 말할 정도로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성과가 전혀 없었던 곳이 아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는 좋은 성과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 전함을 듣고 믿는 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바울에게 일어나는 상황과 형편들은 항상 바울을 곤란과 힘든 처지로 밀어 넣었던 것입니다. 어딜 가나 바울을 반대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바울이 원하지 않게 항상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들이 이어져서 결국 고린도까지 오게 되고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된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어떤 도시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 알게 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단지 만나서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얼마나 비중있는 사람들이었는가는 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이 성경에는 몇 번 등장하지 않지만, 그 내용들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큰 도움이 되고 힘이 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18:24절부터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에베소에 온 유대인을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볼로는 사도 바울에게 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로마서 16:3-4절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을 위해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와 사도 바울은 그저 고린도에서 만난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부터 알던 관계도 아니고 혈연관계도 더욱 아닙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마음은 맞았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위해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아굴라 부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들을 만났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일에 있어서 큰 힘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기 위해 고린도로 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저런 상황에 밀리다보니 고린도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에게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성과라는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이 바울을 고린도로 가게 했고, 결국 고린도에서 큰 힘이 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고린도에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거하고 있었는데 당시 로마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은 로마에 거할 수 없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에 로마를 떠나서 고린도에 오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로마에서 유대인을 쫓아내는 것이 없었다면, 그리고 바울이 자기의 뜻과는 반대로 마게도냐로 가게 되고,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으며 쫓겨 다니지 않았다면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만남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냥 생각으로만 믿지 마시고 실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 것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일의 가치는 세상적인 시각으로 판단하는 습성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선교사가 먼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합니다. 30년 선교를 했는데 겨우 1명만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실패한 선교라고 말할 것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 역시 그동안 선교비를 투자한 것에 대해 아까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1명이 복음을 위해서 힘써 일하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서 많은 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실패한 선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열심히 복음을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믿으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것이 우리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어떤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되어진 일을 보면서 실패하거나 낙심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언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에게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로 온 바울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장막 만드는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장막 만드는 사람을 찾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고린도에 왔다 할지라도 바울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양식을 위해서 장막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아굴라 부부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바울의 뜻대로 안되었던 인생이 바울을 위해 목숨도 내어 놓을 동역자를 만나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바울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것이 득이 되었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원망하는 것은 ‘왜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되느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모든 일이 내 뜻대로만 되어지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지금 불행한 것은 내가 원한대로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으심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을 이루시는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신다면 현재 나타난 결과만으로 인생을 판단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되어졌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를 알지 못한 자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당장 저의 경우만 해도 그런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 인생이 제가 원했던 대로 되어졌다면 저는 예수를 믿지 않은 자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인생이 제가 원한 대로 되어지지 않은 것에 다행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서 복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만남은 여러분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뜻대로 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현재를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현재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실패를 인도하시고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 일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올지 그것은 기다려볼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로 살기보다는 돈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원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보다는 돈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을 더 원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장차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 당장 좋은 것으로 열매 맺기를 원하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의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지나갈 것에 불과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마지막에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자는 신앙으로 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