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1 신앙인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오게 된 경위부터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였고, 그리고 고린도에서 사도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 바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된 결과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생각한다면 현재의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불만과 원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다면, 지금 자신의 삶이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편임을 믿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어진 삶에서 힘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사는 신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고 정립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 나의 삶은 나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내 마음대로 안되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에 내 삶은 내 마음대로 되어질 수 없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운명론자와 같은 생각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운명론자는 ‘이미 운명은 정해졌으니 내가 힘써 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자’는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살아가는 신앙은 자신의 존재 이유 자체를 하나님의 뜻에 둔다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운명론자는 ‘신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어졌기 때문에 인간쪽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신이 정한 운명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이 자기 운명을 위해 할 것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면, 신앙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인도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데, 5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데살로니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바울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옷을 떨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절)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옷을 떠는 것은 13:51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행동은 너희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생명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 역시 바울의 복음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곳이었고, 지역적인 조건을 생각해도 고린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힘든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는 지역적으로 동쪽과 서쪽이 모두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바다 무역이 아주 발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바다가 있는 도시는 우상이 성행하였습니다. 고린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우상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봐도 고린도라는 지역은 우상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무역이 발달한 관계로 경제적으로도 부한 도시였기 때문에 사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구원에 마음을 둘 지역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누리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갖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곳이고, 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여전히 있는 곳이라면 다른 곳에서처럼 떠나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지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 그 틈바구니에서 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린도 역시 사도 바울에게 편한 곳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해 대적하고 훼방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이고 우상이 성행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믿음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꿈꿉니다. 믿는 가정에 시집가려고 하는 것도 자신의 믿음 생활의 편함을 위한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불신자나 타 종교를 믿는 집안으로 가면 신앙생활이 힘들어 진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을 선택을 해도 주일을 잘 지킬 수 있는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를 먼저 따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조건을 따지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혹 그런 것을 따지는 이유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신앙을 잘 보존하고 살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이, 믿음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하나님께 오라는 뜻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믿음은 어디에서 살든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셨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 개인 신앙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신자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희박해지지 않습니까? 차라리 신앙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더 큰 은혜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생활에 편안한 환경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신앙을 생각할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두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할일은 자신의 신앙을 잘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을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내가 실수해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자신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주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시는 것은, 우리를 내세워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게 하시는 것은, 고린도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고린도까지 오게 하신 것이고, 바울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고 우상이 성행하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바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삶과 인생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가꾸어 가겠다는 우리들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일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던 길로 우리를 밀어 넣으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힘들고 어렵다는 것 때문에 지금의 자신의 형편에 대해 거부하려는 마음만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욕심에 의한 계획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획을 가질 수는 있으되 결국 그것은 나의 욕심이었음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의 삶을 주시는 이유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 항복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고 대적으로부터 지키신다는 것은 바울 개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많은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서 바울에게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 나의 삶을 두고 불평하거나 원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의 사람이 되어진 것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힘이 될 수 없으며 귀하고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임을 증거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이 일을 위해 지금 그 자리에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현재의 그곳에 살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의 할일은 분명합니다. 어떤 경우에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식을 양육하는 일에도 믿음에 빠지면 안되고, 직장 생활에서도 믿음이 빠지면 안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