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7 유대인들의 고소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끌려나와 고소를 당하는 내용입니다. 죄목은 13절에서 말하는 대로 바울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항상 깊은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율법은 그들이 오랜 세월을 흘러오면서 본래의 율법에 그들의 법을 더 추가시킨 그들의 법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을 사랑하였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을 공경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율법을 대적하는 자들이 곧 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여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지금 예수님이 받으셨던 그 고난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듯 예수님의 사람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것은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더욱 강화하고 높이기 위하여 세분화된 많은 법을 더욱 추가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교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수많은 조항들을 추가하여 가르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신앙으로 여기며 행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에 의해서 추가되고 형성된 것들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역시 인간의 유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펴 놓고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예로써 우리는 지금 짜여진 순서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어디에도 예배를 위한 순서가 제정된 것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 역시 어떤 순서를 정해놓고 그 순서에 의해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예배 의식과 그 순서는 카톨릭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카톨릭은 유대 성전 제사와 이교인 그리스의 정결의식, 대리제사, 동참의식 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교와 유대교 의식이 합성되어서 크리스챤이란 이름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이처럼 짜여진 예배 순서에 의해 드려지는 경직된 예배에 반대해서 등장한 것이 ‘열린 예배’인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자유롭게 행함으로써 은혜를 얻어 보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행한다 할지라도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 역시 열린 예배로서의 하나의 틀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 순서를 없애면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까? 순서를 없앤다고 해도 역시 또 다른 순서가 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지금 행하는 것들을 없애자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들을 성경과 일치시키지 말자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어떤 제도와 의식을 남겨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존에 제도와 의식들을 거룩한 것으로 여긴다면, 누구든 의식을 반대하고 제도를 파괴하려고 할 때 유대인들처럼 그를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행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도 모른 사이에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성경대로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갖게 됨으로써 누구든 기존 기독교의 제도나 의식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섬기는 것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바울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다는 이유로 고소하는 것이 옳습니까? 무조건 바울이 옳으니까 누구든 바울을 고소하면 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을 버리시고 바울을 전혀 알지 못한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했다고 고소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세우실 구세주에 대해서 명시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을 믿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하는데, 율법이 바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곧 율법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 전체가 그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지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율법을 파괴한 자로 여긴 예수를 믿으라는 바울의 말은 예수와 한통속으로 그들의 율법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또 사실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율법대로 행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율법에는 성전에서 예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어기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율법에 반대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율법을 어기는 자로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스스로도 주일을 지키지를 못하면서 주일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주일 성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주일에 지켜야 할 규례로서 안식일 규례를 적용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58:13절을 보면 안식일에는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즐거운 날로 여길 것이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규례대로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다.

이 규례대로 하면 주일에는 오락을 하면 안됩니다. 오락이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또 주일에는 화를 내거나 염려 근심 걱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은 즐거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말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말을 해야 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주일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는 단지 예배 참석하는 것을 주일 성수의 전부로 가르쳐 버립니다. 교인들에게서 주일에 대한 무거운 짐을 벗겨 주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은 빼놓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공경을 미끼삼아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도록 하려는 수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바울의 말은 오히려 율법을 완전히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의미하는 하나님 공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할 악한 죄인들임을 자각하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한 시간 예배드리고, 십일조를 한 것이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여러분의 행위를 고의로 폄하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 공경을 여러분의 행위에 두고 있을 것을 염려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하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물을 하나님께 바치면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유전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책망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책망이 곧 우리에 대한 책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것으로 증거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23절에 보면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그가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절대로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무엇을 행하고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에 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사망에 처했어야 할 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예수님으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최고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훈을 계명삼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