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28 아볼로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고 윗사람이 아래 사람을 가르치는 일조차도 현대 사회에서는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만약 스스로 학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누군가가 가르치려고 한다면 분명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가 목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앉아 있는 것은 상대방이 목사라는 직책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목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고 앉아 있는 것이지 만약 목사가 아닌 자가 가르친다면 뭔가 반발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목사가 가르친다 할지라도 ‘나도 성경을 알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목사의 가르침에 대해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 앞에서든 낮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였을 때 자랑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내가 너보다 더 좋은 것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가 자랑을 하는 것은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 자신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군가가 여러분을 가르치고자 할 때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러분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고, 또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24절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볼로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초대교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절에 보면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4개 당파가 있었는데 그 당파 중에 하나가 아볼로 파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볼로를 높이는 사람들로 하나의 당파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아볼로가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고린도전서 3: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아볼로는 바울과 동등한 위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볼로가 에베소에 왔을 때도 학문이 많고 성경이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서 예수에 관한 것을 말하며 가르치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이나 학문이나 주의 도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기가 쉽지 않음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사일수록 심합니다. 목사는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성경에 능한 사람, 이것이 세상이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일반 신자에게 성경에 대해 가르침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본문의 아볼로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그대로 풀이하면 아볼로가 회당에서 주의 도를 가르칠 때 그것을 듣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가 복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볼로의 입장에 있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행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저 같아도 순순히 가르침을 배우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령 제가 여러분께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들은 어떤 분이 저를 불러다가 제가 성경에 무지하다고 하면서 성경을 가르칠 때 감사한 마음으로 아무런 반발 없이 경청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저의 자존심과 체면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순전히 복음만을 생각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복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므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반발과 충돌만 있을 것입니다. ‘나도 알만큼은 안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할 것이고, 더군다나 ‘나는 목사다’라는 생각이 살아있다면 반발은 더욱 더 거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볼로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아볼로가 그리스도로 세례 받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자신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당에서의 아볼로의 가르침이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보다는 단지 배워서 알고 있던 인간의 지식을 중심으로 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는 복음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교회 안에는 스승으로 정해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무조건 스승이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목사가 깨달은 복음을 여러분께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스승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깨달은 바로 그분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사는 그분이 곧 우리의 스승인 것입니다. 때로는 목사의 설교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으로 살아가는 귀한 삶 앞에서는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몇 십 분의 설교보다는 여러분의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형제의 삶이 더 큰 가르침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생각을 가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은 알되 그리스도는 모르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머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되 내 삶은 주님을 거부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에게 누가 스승이겠습니까? 모든 삶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로 사는 그분이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생각으로 모일 때 진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27-28절을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볼로는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게 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여 유대인의 말을 이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볼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초대교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진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항상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가지고도 싸우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시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르치시고 유익된 자로 만드시고 도움을 두기 위해 형제를 여러분 곁에 두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가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죽어야 할 죄인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우리가 목사라고 해서 달라질 것 없고 장로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더 잘하는가?’라는 싸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누가 그리스도로 사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 지식도 그리스도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모두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전혀 모른다 할지라도 예수님 한분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시골구석의 할머니가 우리의 스승일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누구에게서든, 설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가르침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는 분이라면 그분이 곧 나의 스승이라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그러한 신자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유익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진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