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세례

본문에 보면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린 대개 세례를 말하면 교회에서 목사에게 받는 세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세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고 받기는 하지만 항상 자신이 세례 받은 자임을 의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게 받은 세례가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인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에서의 의식하나를 거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말고 다른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는 세례인데,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세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성령 세례가 우리를 지키고 다스리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바울이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은,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이 행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뭔가 성령이 함께 한 신자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물음으로 인해서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요한세례만 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들이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는 것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18:25절에서 아볼로에 대해 그가 성경에 능한 자이며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볼로 역시 성령을 몰랐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할 때 브리스길라와 아볼로가 그것을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경에 능하고 예수에 관해서 안다는 것과 성령을 알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을 보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는가 물은 것이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역시 아볼로의 말을 듣고 뭔가 그가 모른 것이 있다고 여겼기에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요한의 세례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성령이 임하시는 것, 즉 성령 세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만으로는 안되고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 살아가는 것과 성령을 받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을 보고 성령을 받았는가 물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역시 요한의 세례만 받은 아볼로의 말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가르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떤 의미의 세례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요한의 세례란 요한의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가르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의 세례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 받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구원 문제는 끝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말을 들어볼 때 분명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세례 받은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바라보고 살아야 할 대상이 없습니다. 아볼로가 주의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수준에서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아볼로의 마음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의 세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는 단지 예수님을 믿게 하는 도구요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차원이며, 우리가 죄인임을 알았을 때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믿는 것이 진정한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이 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 3:11-12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에서도 보면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질적으로 다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오늘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자신들이 성령세례가 아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회개하는 것에 더 나아가서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세례 자체가 곧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또 내 스스로도 내가 죄인임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겨우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성령과 불로 세례 받은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앎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전부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만으로 살아가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죄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며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자기보다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과 봉사를 보고 살기 때문에 나 역시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예수님보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기도할 때 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요한의 세례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다만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실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버리신 현장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손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으로서는 회개는 할지언정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로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누가 못하겠습니까? 힘든 것은 내가 말한 대로 사는 것이고 기도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살펴야 하는 것은, 기도한 대로 살고자 힘쓰는가 입니다. 내가 고백하고 말한 대로 살기를 힘쓰는가를 돌아보십시오. 말이 말로서 그쳐 버린다면 우리는 요한의 세례에 머물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 말에만 있지 아니하고 삶에, 여러분의 몸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에 있고 삶에 있다면, 그분의 삶은 분명 봉사와 섬김과 희생과 사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 받은 모습입니다.